<배꼽을 위한 연가 5>에서의 한 단어
개안(開眼)
'인당수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저는 살아서 시를 짓겠습니다.'
시를 읽냐는 질문에 내가 학생에게 대답한 제일 좋아하는 시 구절이다. 곱씹으면서 즐기는 그런 구절. '쌤, 진짜 시를 읽어요?'라는 말을 들으며 웃어넘겼지만 이 시를 읽기 전까지 일하는 내내 나에게 시는 즐기기에는 어렵고, 일하기에는 힘든 그런 갈래였다.
일을 하며 나를 위한 글보다 일을 위한 글을 읽었었다. 관성적으로 소설을 분석하고 시를 해석하던 나날이었다. 그 시절을 보내며 내 안에 가득 찼던 반짝이는 작품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어느새 나를 위한 글을 없고 남을 위한 겉 읽기만 남아있었다.
좋은 글을 읽은 순간의 벅찬 가슴과 설레는 손짓은 그저 내 작은방 안에 치워두고 점점 나를 위한 글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일을 할 때면 늘 글과 함께하지만 더없이 글과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특히 시를 읽는 순간은 점점 기계적으로 바뀌었다. 시에 나오는 표현 방식, 심상, 시상 전개, 화자의 정서, 시적 대상을 바라는 화자의 태도 등을 매일매일 분석하다 보니 나를 위한 시는 사라졌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는데 나는 한 계절도 버티지 못하고 시를 버렸다. '만날 때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나의 문학은 나를 떠났다.
한동안 다른 재밌는 것들이 많다고 자위하며 문학을 멀리하는 당위성을 찾던 때, 심각성을 느낀 것은 영화관 광고를 본 후였다. 광고 속에서 한 줄씩 시의 구절이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수사법을 생각하며 머리로 글을 갈가리 찢어 붙이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렇게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 들던 그 시절 이 시를 수능 특강에서 마주했다. '인당수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이 한 문장이 나를 잡아당겼다. 글이 나를 붙잡아 끌고 갔다. '어머니 저는 살아서 시를 짓겠습니다. 당신이 평생 어둡더라도 저는 여기 남아 책을 보겠습니다.' 맞아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었지. '우리 스스로 눈을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 뜨자.
그해 수능특강이 나에게 준 것은 월급도 아니고, 더 나은 강의도 아닌, 나를 위한 문학이었다. 그전까지 등한시하던 나의 문학을 단 하나의 시가 다시 되찾아주었다. 나의 문학과 나의 삶을 모두. 다시 읽는 사람이 되자. 나를 구하는 것은 나니까. 나만이 나를 구할 수 있으니까. 저는 여기 남아 책을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