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때문에 소홀히 하는 것은 없습니까? by 수리야
올해부터 '지역혁신 청년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실무를 시작하기 전 일주일간 교육을 받았는데 그중 나의 심금을 울렸던 시간은 박소현 감독의 <야근 대신 뜨개질>을 본 시간이었다. 내가 지난 직장을 떠났던 이유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저릿저릿했고 눈물이 핑 돌았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약 10년간 내가 일을 선택하는 기준은 계속 변했다. 너무 좋아하는 일, 재미있는 일, 칼퇴근하는 일, 활동가를 하기 전에는 이 글에 적었듯이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을 섞은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란 새로운 경험으로 딱딱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관점으로 삶을 만나는 일이었고, ‘잘하는 일’이란 글 정리, 정산, 사무실 및 현장 정리 같은 무엇이든 정리하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의 경험과 역량은 부족했던 터라 ‘잘하는 일’로 입사했고 그때 내 마음은 <야근 대신 뜨개질>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주이의 마음과 꼭 같았다.
“나도 이렇게 멋진 여행을 만드는 거에 이제 일조하는 사람이구나, 그런 자부심 같은 거지. 어떻게 하면은 이 여행을 좀 재밌게 보여줄까? 그런 생각들을 했었던 시기였어서. 그니까 내가 주말에 출근을 해도, 야근을 해도, 내가 바빠도, 그런 게 다 좋았던 거 같아. 왜냐면 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재밌게 하고 있으니까.”
주이처럼 나도 ‘이렇게 멋지고 새로운 일을 만드는 것에 일조하는 사람’이라 자부심을 느꼈고 ‘어떻게 하면 우리 일을 더 의미 있고 재미있게 만들까?’라는 생각에 늘 골몰했다. 출근길도 가벼웠고, 야근을 밥 먹듯 해도 내 일을 무척 좋아했다.
그렇지만 비효율적이고 일방적인 업무 지시를 견디고, 다급한 일정을 맞추다 보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의 과정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항상 좋아야 하니 야근은 하염없이 늘어났다. 다행히 함께 일하는 기쁨을 강력하고 정확하게 느끼게 해 준 좋은 동료들이 있어 화가 솟구치고, 허리가 휠 것 같은 순간들도 웃음으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불합리와 부당함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내 일상이 무너지는 것 역시 막을 수 없었다. 내 일을 좋아하는 마음, 훌륭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틸 수 있었던 시기가 끝났고 나는 회사를 떠났다.
나 하나의 안녕보다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고, 내가 일했던 곳은 그런 일을 하는 곳이라 믿었다. 사회적 기업은 아니지만, 꽉 막힌 일상에 즐거움과 새로움을 불어넣는 선한 가치를 추구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돈을 벌지 않을 수는 없다. 이 모순에서 발생하는 부당한 처우, 낮은 임금, 야근과 과중한 업무, 무너지는 나의 일상은 도대체 누가 어떻게 보상하고 해결할 수 있을지 매일 고민했다. 결국,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야근 대신 뜨개질>의 또 다른 주인공 나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서로 이제 선한 가치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그냥 서로가 서로를 믿고 지나갔던 것들인데, 그거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을 때 되게 불쾌해하고 힘들어하고. '좀만 기다려 나중에 해줄게.'이제 이런 식의 그런 대답이 돌아올 때 실망했던 거 같아.”
눈물 바람만 하다 일찍이 포기하고 퇴사했던 나와 달리 용감한 나나는 회사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결국, 주인공들도 퇴사를 선택하지만, 이들의 선택은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다.(자세한 내용은 영화에서 확인하세요!)
한동안 충분히 멍청히 있으면서 내가 일하는 동안 정말 견디기 힘들고 내가 싫어진 순간이 언제였는지 하나씩 적어보았다. 사람과 세상을 위해 일한다면서 정작 나는 소외했던 순간, 함께 일하는 사람의 성장을 기다릴 시간이 없어 다급하게 몰아세우기만 했던 순간, 사람의 가치를 일의 능력으로만 평가했던 순간, 세월호와 함께 영원히 잠겨버린 아이들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내 일에만 전전긍긍했던 순간, 부당한 처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남 흉을 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이불속 하이킥만 했던 순간 등등.
지금은 내가 적어둔 순간들을 최대한 겪지 않도록 서로 배려하고,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더라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물론 모든 게 완벽하지는 않다. 직군도 바뀌고 야근도 줄었지만 요새도 어떻게 일할지는 늘 고민한다. 나는 나에게 소홀하지 않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살리는’ 일, 그러니까 세상 속에서 알차고 따뜻한 ‘살림’을 하고 싶다. 그리고 아름다운 '살림'의 순간을 하나씩 적어두고 힘들더라도 조금 더 견디고, 나를 싫어하지 않는 힘으로 쓰고 싶다.
다음 '가치 모음집'은 10월 26일(목)에 발행됩니다.
<가치 모음집> 보기
1. 북돋움: 존재만으로도 나를 북돋아 줄 수 있는 한 사람 by 유네
6. 북돋움, 자기사랑: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 by 지혜광
13. 노동: 사원 복지도 좋고 돈 많이 주는 NGO by 지혜광
14. 노동: 나는 다시 노동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by 청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