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rok Yun Feb 23. 2023

[책리뷰]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공간도 삶을 먹고 자라난다.


정방형까지는 아니지만 다소 통통한 비율에 기본보다 아담한 사이즈의 판형, 소소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주황빛 표제와 집을 나타내는 아기자기한 도형을 보는 순간, 덥석 책장을 넘기고 싶어졌다. 이 책의 첫인상이었다. 저자의 문장은 어린 시절 친구처럼 친근하면서도 그 안에 따스하고 부드러운 힘이 있다. 작은 일기장 안 빼곡히 쓰인 듯한 에피소드를 읽고 나면 독자들은 저마다 나의 한 시절을 보낸 집을, 나의 정답고도 애틋한 얼굴들을, 좋아할 수 없지만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던 이웃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라이프앤페이지, 2020) 저자 하재영은 1979년 대구에서 태어나 2006년 계간 ‘아시아’에 단편소설 ‘달팽이들’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버려진 개들의 삶과 죽음을 담은 르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으로 국내 논픽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여성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어린이를 위한 동물권 논픽션 ‘운동화 신은 우탄이’를 썼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가부장적 집안의 사랑받는 소녀에서 자기의 자리를 지켜낸 작가가 되기까지 지나온 집들의 풍경을 구석구석 더듬으며 그 시절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


어두웠던 시대의 유산과 가부장제가 집 안팎을 지배하던 때, 대구 북성로에 위치한 저자의 최초의 집은 ‘집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연다. 비싸고 학군이 좋은 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난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는지, 아직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사회 초년의 여성이 연쇄 살인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역에서 혼자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자신이 겪었던 경험들을 촘촘히 풀어놓는다. 저자가 동생과 함께 살 집을 얻기 위해 돌아다녔던 재개발 지역의 풍경은 빠듯한 예산 내의 집을 얻기 위해 발품 팔아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았음 직한 장면일 것이다. 간신히 재개발 구역을 비껴나간 동네를 찾았지만 진짜 현실의 남루함은 도무지 감춰질 수 없다.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장소가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대접하는 사람, 나의 상처가 아픈 만큼 남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품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가진 것 없는 자가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방어선이었다.”(83쪽)


저자가 여러 집을 거치는 동안 암울한 시간만이 계속되는 건 아니다. 동생과 헤어져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면서 저자는 변화를 겪는다. ‘내 집’을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를 책임지기 위해 애쓴다. 이 시기의 집은 저자가 진정한 독립을 하도록 그녀를 성장시키는 동력이 된다.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기에 용기 내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수 있었고, 결국 자신이 바라던 “여성의 삶을 축소하고 방해하는 가부장적 결혼이 아닌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과정의 연장선상으로서의 결혼”(122쪽)을 하게 된다. 신혼집으로 떠나기 전, 저자가 그동안 고마웠다고 집에게 인사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독자들로 하여금 마음 속 깊이 박수를 보내게 하지 않을까.


“나의 이야기는 나에 대한, 나를 위한 개인적 기록만은 아니다. 자신 안에 갇히는 나르시시즘적 행위가 아니라 나의 삶을 해석하고 사유하기 위해, 그다음에는 스스로를 무한히 확대하고 다른 존재와 연결되기 위해 나는 쓰고 싶다. 자전적 이야기라도 그 안에는 사회나 시대, 타자와 관계된 무언가가 있다.”(135쪽)


‘자기만의 방’을 소유한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물리적 공간의 점유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저자에게 자기만의 방이란 나 자신으로 인정받는 곳이며, 나의 고유함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이다. 집은 나의 자리가 어디인지 묻고, 나의 자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인식하게 하며, 결국 그 어떤 사람이 삶의 풍경을 만들어 간다. 지금 ‘나의 자리’는 어디이며, 그 풍경은 어떠한가? ‘나의 자리’가 없다고 낙심하진 말자. 저자도 인생 한때에 그의 자리가 없었다는 걸 기억하자. 지금 ‘나의 자리’가 있다면 그것이 만들고 있는 내 삶의 풍경을 지긋이 음미해보자. 그것은 안온함인가, 자유로움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긴 애틋함인가.

작가의 이전글 [시] 겨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