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지원 Jun 12. 2023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선과 악 그리고 생존

나는 백로의 깃털이며 물가에서 씻겨 나가는 조개껍데기이자 반딧불이다


카야의 가족은 아빠, 엄마, 머프나 맨디, 미시, 조디, 카야 이렇게 여섯 명이다. 바다와 습지가 닿는 곳에 있는 카야의 집 마당에 이젤 펴놓고 엄마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 옆에서 카야도 새 깃털을 그리곤 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면 좋았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카야의 아버지는 전쟁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었다. 틈만 나면 술을 마시고 아내와 아이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한다. 참다못한 가족들은 하나둘 떠나고 가장 나이 어린 카야만 아버지와 함께 습지에 남는다. 아버지는 카야를 돌보기는커녕 어린 카야에게 집안일을 시킨다. 여섯 살 정도의 나이인 카야는 어떻게 해야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살아남는지 터득했다. 눈에 띄지 않을 것, 소리 내지 않을 것.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곧 떠나 카야는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었다. 학교에 가면 점심이 나온다고 알려준 상점 주인 메이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카야는 바클리 코브 시내에 있는 학교에 간다. 맨발에 쓰는 것, 읽는 것을 모르는 카야를 아이들은 놀리고 괴롭힌다. 더러운 동물을 보는 듯한 눈길에서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낀 카야는 습지로 돌아간다. 그 후로 바클리 코브 시내는 식료품 등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거의 가지 않는다.



습지일대인 자연만이 유일한 친구였던 카야는 새벽 일찍 동이 트기도 전에 홍합을 따서 상점에 팔아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다. 카야가 사는 습지는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이라서 다양한 생물이 살았다. 홍합을 따서 점핀 아저씨와 메이블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상점에 가면 일부는 배를 몰 수 있는 기름으로 또 일부는 돈으로 주어 카야는 옥수수 가루와 초 등을 구입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가족들이 떠나버려서 카야가 할 줄 아는 요리는 옥수수가루를 이용한 것뿐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외딴 습지에서 살기 위해 초는 필수다.



바클리 코브 사람들은 모두 카야를 안다. 카야라는 이름보다는 '습지소녀'라고 부른다. 늘 맨발로 다니는 카야를 야만인 보듯이 흘겨본다. 백인들이 따돌리고 배척하는 카야를 차별받는 흑인인 점핀과 메이블 부부가 챙긴다. 1960년대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는 인종차별이 있었다. 러닝타임 때문에 영화에서 깊이 다루지는 않았지만 몇몇 장면에서 무례한 백인들의 언행이 나온다. 점핀과 메이블 부부는 항의하지 않는다. 늘 맨발이던 카야에게 교회에 남는 신발이 있다며 발 치수를 재고 신발을 신겨준 사람도 메이블 아주머니다. 카야의 몸에 맞는 옷가지들도 종종 챙겨주었다. 이들 부부가 아니었다면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가 38만 평이나 되는 넓은 습지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습지에는 다양한 생물이 산다. 큰 새부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까지. 생명이 탄생하고 일부는 죽는다. 동식물의 사체는 습지와 늪의 미생물이 분해해서 다시 습지 생태계의 일부가 된다. 자연에서의 죽음은 사건도 비극도 '악'도 아니다. 그저 생명의 순환일 뿐. 그렇게 습지는 죽음과 맞닿아있으면서 생명을 탄생시킨다. 습지에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늘 먹을거리를 주지만 생명이 다하여 죽는다면 습지는 그 몸을 양분 삼아 다른 생명으로 에너지를 흘려보낸다.



마을의 두 소년이 화재를 감시하는 망루 근처에서 발견한 시체도 그렇게 될 운명이었으나 늪의 미생물들이 삼켜버리기 전에 발견되었다. 본래 습지에서 일어나는 일에 보안관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그 시체는 바클리 코브의 인기스타 체이스 앤드루스다. 화재 망루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밝혀진 이 사건은 법정으로 이어진다. 망루에 체이스 본인의 지문도 남지 않았다는 것, 계단과 시체 근처에 발자국이 없다는 이유로 검사는 타살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용의자로 습지소녀인 카야가 지목된다. 영화는 법정 공방과 과거를 넘나들며 진행된다. 어린 카야가 성장하며 노인이 되어 죽기까지 때로는 긴박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용의자인 카야의 집을 찾아온 보안관 둘은 카야가 모아놓은 노스캐롤라이나 습지에서 서식하는 갑각류 껍데기를 보며 "과학자야, 마녀야?"라고 말한다. 과학자와 마녀 사이의 간극이 이들에게는 헷갈릴 정도로 가까운 걸까? 1960년대에? 카야가 남자였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후에 카야의 책이 출판된 출판사 대표는 카야에게 보낸 편지에 카야는 타고난 생태학자라고 적었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내주어 감사하다며 완성된 원고를 모두 보내달라고 말한다. 보안관이 집에 찾아왔을 때에도 벽에 카야의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같은 글과 그림을 보며 누군가는 생태학자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마녀를 떠올린다.



박신영 작가의 책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마녀의 경우, 알고 보면 죄 없이 그저 혼자 사는 여인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약초나 구급비방 등 민간 의학 지식을 가진 지혜로운 여자들이 종종 마녀로 몰렸다. 사람들은 필요할 때에는 그녀들의 도움을 구하곤 했지만, 병이 낫지 않거나 환자가 사망할 경우에는 원망감에 그녀들을 마녀로 의심했다. 단지 약값이나 치료비를 내기가 아까워서 마녀로 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중략) 우리가 만난 마녀, 우리가 집을 파괴하고 보석을 빼앗고 불에 태워 죽인 마녀가 실은 우리의 공동체에서 쫓겨난 가장 약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검은 숲'이 무서운 것은 그 숲이 멀리 마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사회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편견을 갖고 약자를 대하며 갑질을 일삼는 우리 사회의 울타리 안에.>




중세시대에 가지고 있던 의식의 흐름이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있고 그것이 이해되지 않으면 '나쁜 것, 위험한 것,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기도 한다. 그리고 집단의식, 공동체 의식이 합세하면 이렇게 규정된 존재는 무리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쫓아낸다. 카야의 경우 집이 원래부터 습지 안에 있었고 바클리 코브 시내와는 물리적 거리가 있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난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 울타리에서는 쫓겨난 것이 맞다. 카야가 냉대와 거부감을 처음 느낀 때가 학교에 스스로 찾아간 날이다. 맨발인 아이가 찻길을 걸어 학교까지 가는 동안 만난 어른이 아무도 없지 않았을 텐데, 그 누구도 카야의 맨발을 걱정하지 않는다. 습지에 있는 집에서 학교까지는 최소한 몇 킬로미터 거리다. 여섯 살 무렵의 여자아이가 혼자 갈 거리는 아니다. 그리고 카야가 습지에 사는 소녀인 것을 모두가 안다.



그녀가 세상과 단절된 채 성장하는 가운데, 오빠 조디의 친구인 테이트가 어느 날 그녀의 마음을 두드린다. 테이트는 카야에게 글을 알려주고 마음을 주고받는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새우잡이 배를 모는 아버지의 희망인 그는 대학에 지원했고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한 달 후 독립기념일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난 테이트는 몇 년 동안 소식이 없다. 그가 세상을 선택하고 카야를 떠난 뒤, 밀려오는 외로움 속, 동네 인기스타인 체이스가 그녀에게 적극적인 고백을 하고, 그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카야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카야의 관심사와 마음결이 닮았던 테이트와는 달리 체이스 앤드루스는 가볍다. 카야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맞지만 체이스의 '사랑한다'는 말은 너를 '소유하고 싶다'는 의미다. 약혼자가 있는 상태의 체이스는 카야를 속이며 즐기는 상대로 대했고 결혼 후에도 카야를 놓지 않으려 했다. 카야가 마음을 거두자 체이스는 카야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마치 카야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일 듯이 자신을 때리고 집착하는 체이스에게서 아버지가 보인다. 카야는 늘 의문이었던 엄마가 왜 떠났는지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살기 위해 떠났다.



원작 소설인 책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바로 손위 오빠지만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은 조디가 집에서 나와 카 야 뒤에 섰다. 조디는 카야와 똑같이 검은 눈에 흑발이었고, 새들의 노래와 별들의 이름과 억새풀을 헤치고 나룻배 젓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엄마는 돌아오실 거야." 조디가 말했다.


"몰라. 엄마 악어 신발 신었어."


"엄마들은 자식을 두고 가지 않아. 원래 그렇게 못 해"


"그 여우는 새끼들을 버리고 잤다면서, 오빠가 그랬잖아."


"그래. 하지만 그 여우는 다리가 찢어져서 만신창이었어. 제 몸도 건사 못 하는데 새끼 먹이까지 챙기려면 굶어 죽을 거야. 새끼들을 두고 떠나 몸을 잘 치료한 다음에 새끼들을 더 잘 기를 수 있을 때 다시 낳는 편이 낫지. 엄마는 배고파 죽을 지경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돌아오실 거야." 조디는 콩알만 한 확신도 없으면서 카야를 위해 이렇게 말했다.


카야는 목이 메어 속삭였다.


"하지만 어디 먼 데 가는지 파랑 가방을 들고 갔단 말이야.">




엄마는 제 몸도 건사 못하는 다리가 찢어져 만신창이가 된 여우였다. 떠나서 몸을 잘 치료한 다시 돌아오려고 떠난 것이다. 모두가 떠나고 엄마로부터 편지가 왔었고 아버지는 그 편지를 읽자마자 태워버렸다. 카야는 재가 된 편지 가루를 모아 병에 담는다.(카야가 죽은 후 유품인 카야의 보물상자에 그 병이 들어있다.) 엄마는 살기 위해 떠났지만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 뱃속에서 습지에서 살았고 습지에서 나고 자란 카야는 습지를 떠나갈 곳이 없다. 무력으로 카야를 제압하고 강간하려던 체이스에게서 도망친 날 체이스는 카야의 집까지 찾아왔다. 카야를 찾지 못하자 집 안을 부수고 엉망으로 해놓고 갔다. 먹잇감을 쫒는 포식자처럼 체이스는 카야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안타깝게도 체이스의 감정에 사랑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지 체이스는 한 번도 진실한 사랑을 받아본 적도 준 적도 없을 뿐. 외동아들인 체이스를 부모님이 많이 사랑하고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려고 했겠지만 체이스가 카야에게 말한 것처럼, 자신이 자신다울 수 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카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이스는 진실할 기회를 놓쳤지만. 카야를 향한 본능적인, 영혼의 끌림이었을 것이다. 법정에서 체이스의 엄마가 "체이스는 4년 동안 한 번도 조개 목걸이를 벗은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습관에 가까운 것일지 모르나 사람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몸에 지닌다. 펄과 결혼한 후에도 잘 때조차 벗어놓지 않았다는 것은 체이스에게 카야의 존재가 집착에 가까울 만큼 광적인 끌림 혹은 소유욕을 자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제야 엄마가 왜 떠나야 했는지를 이해했다.

아빠로부터 배운 게 있다면 이런 놈들은 포기란 걸 모른다는 것이다.

혼자 사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두려움에 떨며 사는 건 차원이 다르다.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또 언제 맞을까만 생각하며 사는 것. "  _카야(캐서린 대니얼 클라크)



자연 그 자체인 습지에서 죽고 죽이는 관계는 늘 도처에 있다. 거기에 선과 악은 없다. 생존만이 있을 뿐. 먹잇감이 포식자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달아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끈질기게 다가오는 포식자에게서 먹잇감이 살아나기란 쉽지 않다.



"곤충 암컷이 짝 수컷을 먹기도 해요.

반딧불이의 불빛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짝짓기를 위해서고 하나는 수컷을 꼬셔 먹이로 삼기 위해서죠.  _카야(캐서린 대니얼 클라크)


그래서, 먹는다고요?  _출판사 관계자 1


끔찍해라. _출판사 관계자 2


그런 건 배우면 안 되겠어요.

비도덕적이네요. _해리슨 모리슨 출판사 편집장 로버트 포스터


자연에 선과 악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방법들이죠.

환경이 환경이니만큼요. _카야(캐서린 대니얼 클라크)




반딧불이는 카야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관객의 상상에 맡길 뿐. 아마도 카야는 체이스를 부드럽게 불러냈을 것이다. 먹이로 삼기 위한 불빛을 짝짓기를 위한 불빛으로 착각한 체이스는 기분 좋게 화재 망루 계단을 밟았을 것이다. 결국 체이스는 용의자로 지목받은 카야가 죽인 게 맞다. 체이스의 시체에서 사라진 조개 목걸이가 카야가 죽은 뒤 카야의 일기장에 숨겨놓은 것을 테이트가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카야에게 죄인이라고 , 살인자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만약에 카야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체이스에게 평생을 성적으로 물리적으로 괴롭힘 당했을 것이다. 어쩌면 죽은 이가 카야였을지도 모르겠다. 카야가 습지를 떠나는 방법도 있지 않냐고 묻는 이가 있겠지만, 평생을 가꿔온 터전을 왜 피해자가 떠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누구도 죽지 않고 해결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작정하고 괴롭히는 가해자를 법이 지켜주지도 않고 사회구성원들이 보호해주지도 않는다. 체이스는 방탕한 짓을 일삼아도 사랑받는 내부인이고 카야는 피해 주는 것 하나 없어도 그들에게 외부인이었으니까.



결론을 보면 법정에서 심증만으로 추론했던 검사의 모든 말들이 다 사실이었다. 발자국과 지문을 지우고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가져간 것은 카야가 맞으니까. 카야는 체이스의 목에 있던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왜 가져갔을까? 여느 연쇄 살인자들이 하는 것처럼 살인을 기념하기 위해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을 아닐 텐데. 아마도 카야는 얼룩가리비(펙텐 오나투스 Pecten Ornatus)를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원래 남쪽에서 사는 그 조개는 이곳 캐롤라이나 습지에서 수온이 낮아서 살지 못한다고 체이스에게 말한 것처럼 체이스는 카야의 안식처가 아니기에 체이스의 곁에 둘 수 없었을 것. 자신의 자리인 습지 집으로 가져왔을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야생 동물이 숨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인데 카야는 습지 생물 그 자체다. 그렇다면 카야에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습지, 그리고 습지에 있는 자신의 집이다. 카야가 체이스를 죽이지 않고 떠나는 선택을 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자신이 가장 자신다울 수 있는 이곳 습지를 떠날 수 없어서. 칸트가 내 생각을 읽는다면 나에게 틀렸다고, 실천이성비판에 썼듯이 그래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하겠지만, 그리고 나도 평소에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체이스를 죽인 게 카야라는 반전이 그리 충격이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일이었어,라고 카야를 편들게 된다. 나도 카야를 인간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습지 생물로 보고 있나 보다. 습지에서는 선과 악이 따로 없으니까. 죽어 습지의 일부가 된 카야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 38만 평의 습지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만으로 나는 늘 충분했다.

파도가 가면 오듯이 자연이 인도하는 대로.

습지는 죽음을 통달하고 있다.

비극이라고 규정짓지도 않는다.

죄는 더더욱 아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남기 위해 그러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가끔 먹잇감이 살아남으려면 포식자는 죽어야 한다.

이제 나는 습지가 되었다.

나는 백로의 깃털이며 물가에서 씻겨 나가는 조개껍데기이자 반딧불이다.

반딧불이 수백 마리가 습지 깊은 곳에서 반짝일 때 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저편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_카야(캐서린 대니얼 클라크)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건져 올린 질문들    


* 내 마음이 습지라면 늪은 어떤 의미인가?

* 내가 자연에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변화는 어떤 의미인가?

* 내가 휘청거릴 때 붙잡아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 나는 무엇으로 충분한가? 충분하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코치 카터>, 가장 힘든 승부는 자신을 이기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