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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목 Jul 04. 2023

내가 떠나는 이유

여행을 즐기지 않는 친구 한 명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왜 여행을 떠나느냐고. 당황스러웠다.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굳이 거창한 이유를 던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호기심이 그 이유라 간단히 답변했다. 내가 태어난 이 지구에 존재하는 다른 장소들이 궁금하지 않냐고 반문하면서. 그 당시에 강하게 꽂혀 있었던 생각이자, 실제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방금의 내 답변에 '굳이?'라고 반문하는 친구의 마음을 움직이기엔 그 답변이 가진 힘이 강하지 않았다.


여행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기에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 수도 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질문을 던진 사람의 고개를 끄덕일만한 그럴듯한 이유 정도는 찾고 싶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는 없더라도, 계속 던지다 보면 누군가는 계란을 던지는 사람의 의도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 뒤로 소설가가 좋은 문장을 써내기 위해 단어를 수집하듯,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답변을 찾기 위해 여행의 이유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여행이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내가 찾은 그럴듯한 이유 중 하나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낯선 환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낯선 언어, 낯선 온도, 낯선 향기. 일상에서 마주하지 못한 낯선 환경 속에서 입국 수속을 하고, 짐을 찾고, 숙소로 가는 길을 검색한다. 그 과정은 여행의 시작일 뿐이다.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는, 일상에선 습관과 같았던 행위들이 낯선 장소에서는 더 이상 익숙한 것이 아니게 된다. 


어떻게 보면, 여행의 모든 과정은 낯선 환경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문제해결의 과정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여행을 하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도, 긴장감만으로 내 빈틈을 모두 메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익숙한 환경에서도 실수를 하는 것이 사람인데, 낯선 환경에서 어떤 어려움도 마주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른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삶이고, 여행도 삶의 일부니까 말이다.


나도 여행을 떠나는 순간마다 무사귀환을 꿈꿨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문제가 전무했던 여행은 없었던 것 같다. 


2016년 여름, 첫 유럽 여행 때 문제를 겪었던 상황들은 아직도 선명하다. 특히 호프브로이 하우스에서 겪었던 인종차별과 뮌헨 호스텔에서 지갑을 도둑맞은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로 인해, 뮌헨은 내 머릿속에 좋은 여행지로 남아있지 않다.  


때마침 뮌헨에 있었을 때가 유로 2016이 진행 중이던 때라,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이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함께 갔던 친구와 나는 각자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과 등번호가 마킹된 유니폼을 골라 샀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유니폼에 마킹된 선수가 금발이고 백인이라 부러워서 산 것이 아니냐는 말을 비롯한 여러 인종차별적 발언을 면전에서 듣게 될 줄은. 취한 상태의 금발 청년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던 우리 앞에 서서 모욕적인 말들을 큰 소리로 뱉어댔지만, 아무도 우리의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문제가 커지면 여행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너무 당황스러워 가라고 얘기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낯선 장소에서 우리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그들을 자리로 돌려보내긴 했지만, 술맛과 기분 모두 이미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더 큰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발생했다. 뮌헨을 떠나 추크슈피체로 가기로 한 날이었는데, 카드들과 대략 300유로 정도의 현금이 들어있던 내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채로 방 안 곳곳을 뒤지고, 호스텔 직원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지갑은 찾지 못했다. 우리 일행과 같은 방에서 지냈던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이라 너무 마음을 놓았던 것일까. 왜 대부분의 현금과 카드를 지갑에 다 넣어놨을까. 여러 후회들이 밀려왔다. 결국 체념한 채로 카드사에 전화를 걸어 잃어버린 카드들을 정지하고, 근처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한 뒤에 추크슈피체로 향하는 기차에 탔다. 만약 혼자였다면 향후 일정에 차질이 생길만한 큰 문제였지만, 함께했던 친구들 덕에 남은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항상 있었다. 타이페이에선 사진에서 봤던 것과는 다른 환경의 숙소를 마주했고, 오사카에서는 여행 내내 감기를 달고 다녔으며, 몽골에서는 여행 막바지에 심한 장염에 걸렸었다.


좀 더 신경을 썼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문제도 있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들도 많았다. 감기와 장염, 술에 취한 인종차별자를 내가 어찌할 수 있으랴. 세상의 일에는 손아귀 밖에 있는 행운과 위험들이 항상 개입된다. 그럼에도 켜켜이 쌓인 여행의 경험들은 우리를 더 능숙한 여행자로 만든다. 


꼭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낯선 환경과 문제들을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으므로, 그 경험들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성장시킨다. 낯선 환경에 더욱 쉽게 적응하고, 새로운 문제를 마주했을 때 덜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으로. 어떤 불행도 쉽게 털어버릴 수 있는 강인한 사람으로.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


낯선 공간에서 겪는 어려움과 실수, 이를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의 성장을 여행의 이유로 들었지만, 여행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이와 같은 논리적인 이유로만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생각한다.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마법 같은 순간. 일상에서 채워지지 않았던 무언가를 낯선 장소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여행이 순탄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우리가 떠나는 이유는 여행지에서 마주하는 의외의 순간 자체이지 않을까. 


2016년 여름, 할슈타트와 프라하

2016년 여름 떠났던 유럽여행 때, 뮌헨에서 인종차별적 발언도 듣고, 지갑도 잃어버렸다. 그런 문제를 겪었음에도 내가 또 여행을 계획하고, 짐을 싸서 떠나는 이유는 여행지에서 경험했던 마법 같은 순간들 때문이다. 넋을 놓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그 풍경을 마주했을 때 밀려오는 감동. 아직도 난 플리트비체 호수, 잘츠부르크의 거리, 할슈타트 등 여러 장소의 비현실적인 풍경을 마주했을 때 벅차오르던 감정과 프라하에서 코젤 흑맥주를 마시고 약간 취한 상태로 카를교를 건널 때 느꼈던 황홀함을 잊을 수 없다.


난 또 어딘가로 떠날 것이다. 여행지에서 마주할지도 모를 마법 같은 순간과 여행 이후에 조금은 성장할지도 모를 나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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