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정 감독의 <소리도 없이>
영화가 가진 체험과 공감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극 중 개인의 삶을 체험하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이입한다. 그 힘은 너무나도 강해서, 때로는 극 중 악인의 감정에까지 이입하게 한다. 공감을 넘어, 심지어는 악인의 삶을 응원하는 순간을 맞기도 한다. 그리고 그 힘은 나도 모르는 새에 서서히 스며들어서,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주는 당혹감은 무척이나 크다.
<소리도 없이>는 치밀한 영화다. 매우 치밀해서, 공감의 방향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드는 시점을 뒤로 계속해서 미룬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정신이 든다. 내가 지금까지 유괴범과 아이가 공존하는 삶을 바라고 있었던 것인가. 나는 이제껏 범죄자의 편에 선 것인가. 나는 진정 아이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건가.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에 크나큰 당혹감이 밀려오고, 머리를 망치로 맞은듯한 기분이 든다.
근데 악인에게 감정 이입이 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자신에게 선만 존재한다는 사람은 허풍쟁이 혹은 사기꾼이다. 무엇인가를 탐하는 것.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에게 욕하고, 심지어는 해를 가하고자 하는 욕구가 일렁이는 것.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다만, 대부분이 사회적 규범 내에서 그것을 절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종교의 지향점도 악한 마음 없이 선한 마음으로 충만한 완벽한 사람이 아닌, 잘못된 행동과 생각을 반성하고, 무엇인가를 탐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막말로 어떤가. 기껏해야 영화인데. 대략 2시간 정도 되는 분량의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거나, 화면을 끄는 것으로 끝난다. 많은 사람이 끝나고 나서도 삶에 영향을 미치는 영화를 인생 영화라고 하던데, 그 영향이 커봤자 얼마나 크겠는가. 한 영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다면, 그것은 영화가 아닌 그 사람의 인생이 위험한 것이다. 영화에서 악인의 감정에 이입하거나, 응원을 하는 행위는 그리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영화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치밀하게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잘못된 것이라면 영화 내의 반도덕적인 행위는 모두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공이 자유자재로 튀어 오르기 위해서는 그런 제약이 없어야 한다. 예술의 방향이 실제 삶에서 제시하는 윤리의 기준과 꼭 궤를 같이 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를 다시 되새김질해 보면, 사실 <소리도 없이>는 친절한 영화다. 시체수습으로 생계유지를 하던 태인과 창복에게 유괴된 초희는 틈이 생길 때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휴대전화에 손을 뻗어 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를 쉴 새 없이 내달리기도 했다. 이렇게 영화는 초희가 집으로 돌아가려 부단히 노력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보여주지만,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태인과 초희가 함께 사는 삶을 바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리도 없이>는 치밀한 영화다. 계속해서 친절하게 단서를 던져주지만, 관객이 그것을 외면하게 할 정도로.
영화를 보는 내내, <소리도 없이>라는 제목이 말을 하지 못하는 태인의 삶을 향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제목은 사실 초희가 집에 돌아가기 위해 택한 방법과 태도를 향하고 있었다.
엉망이었던 태인의 방을 정리하고, 태인의 동생과 놀아주고, 태인과 창복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던 것은 그 삶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집에 돌아가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태인이 집에 찾아온 경찰과 실랑이를 한 뒤에, 그 경찰을 땅에 묻을 때 같이 흙을 파냈던 것도 초희의 생존전략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태인과 초희가 살던 장소는 카메라에 너무나도 아름답게 담긴다. 그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겨서, 초희의 입장에선 몹쓸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초희가 소리도 없이 집에 가기 위해 노력하고, 영화는 소리도 없이 관객의 마음을 뒤흔들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한다. 그 덕에, 학교에 도착한 뒤 선생님에게 다가가 태인을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던 초희의 모습이 더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던 것이 아닐까.
음악을 듣다가 너무 마음에 드는 음악을 발견하면, 바로 휴대폰을 들고 어떤 뮤지션의 것인지 확인한다. 이후에 그 뮤지션의 앨범을 찾아 듣고, 그 앨범마저 너무 마음에 들면 다음 앨범을 기다리게 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화가 너무 마음에 들면 감독의 이름을 외워뒀다가 다음 영화를 기다리게 된다.
그렇게 마음에 든 음악이나 영화를 발견하는 것은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다림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삶을 살아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처음 보는 감독의 작품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이토록 크다. 좋은 영화는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기다림은 살아야 할 이유가 될 수 있기에. <소리도 없이>를 보고 난 후, 홍의정이란 이름을 달고 나올 앞으로의 작품에 대한 기다림은 내 삶이란 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벽돌을 얹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