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행복의 상관관계
마다가스카르에서 운츄라는 소녀를 처음 본 날이 기억난다. 흙바닥을 뛰어다니던 그 소녀는 맨발에 찢어진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찢어진 스타킹을 신은 소녀'. 그 장면은 나에게 연민과 안쓰러움, 반성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들게 했고 눈물이 찔끔 나왔던 기억이 난다. 찢어진 스타킹은 곧 가난을 의미하며, 그 가난의 증표를 입은 아이는 불행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 불행한 아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삐뚤어진 시선이었음을 한참이 지난 후에 깨달을 수 있었다. 경제성으로 삶의 가치까지 판단해버린 나의 생각이었다.
'가난하면 불행하다.' 나는 이 말이 참이라는 것에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1+1=2인 것처럼, 가난과 불행은 당연한 인과관계라고 생각했다. 이 공식에 대해 진지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현지 NGO에서 일하는 나린드라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나린드라는 마다가스카르의 현지인인 말라가시인이며, 현지인으로는 드물게 간단한 영어가 가능했다. 또한, 사고가 자유로운 신여성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자유로운 대화는 힘들었지만, 나린드라의 영어, 우리의 말라가시어, 그리고 손짓 발짓으로 서로의 의사를 교환할 수 있었다.
각자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마주하게 된 주제는 바로, '자살'이었다. 한국에 자살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일 정도로 높다고 이야기를 하니, 나린드라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대체 그 부유한 강국인 한국의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자살을 하냐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난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 같다고 답을 했다. 돈이 없어서 결혼도 힘들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도 돈이 없어서 키우기가 어렵고, 나도 모든 경우를 알지는 못하지만, 한국에서 보통 힘들다고 하는 것들은 경제적인 것인데 이것이 자살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고 덧붙여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도 한국의 청년세대 중 한 사람이라 그 어려움에 이입되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린드라의 표정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린드라가 이야기했다. “만약에, 가난해서 자살을 하는 것이라면 마다가스카르의 사람들은 다 자살해야 맞다. 굶는 아이들이 대부분이고, 일자리는 한국보다 더 없을 것이고, 남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다 지방으로 내려가지만 그나마 얼마 받지도 못한다. 그보다 더 심한 상황이 많음에도, 그것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경제적 이유로 자살까지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린드라는 한국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했다.
찢어진 스타킹에 맨발로 뛰노는 운츄(물론, 신발이 있어도 잘 신지 않는 문화적 이유도 있다.)를 다시 생각해 본다. 겉보기에는 가난해 보이고, 그래서 불행하다고 생각되었던 운츄였다. 하지만, 처음 만난 순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운츄를 보고 불쌍하다거나 불행하다는 등의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맑고 밝은 모습들이 내 머리에 남아있다. 벽돌로 지은 방 한 칸으로 된 네모난 집에 살아도, 그 집에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네 명의 남매가 살아도 그것이 그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운츄 하나만을 보고 그 나라의 모든 사람을 규정할 수는 없다. 또한 모든 한국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불행한 것도 아니다. 단지,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라는 동화 같은 말이 이곳에서는 결코 거짓이 아님을 매일 같이 만나는 운츄와 그 땅의 사람들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삶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가진 것보다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또한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 함께 살아가는 나의 친구들이나 젊은 세대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운츄가 뛰어놀던 마당에는 그 가족이 키우는 병아리가 한 마리 있었다. 평소에는 닭고기가 비싸서 잘 먹지 못하기에, 가을 즈음에 병아리를 사서 크리스마스 때까지 성장한 닭을 요리해서 먹기 위해서 키우는 것이었다. 나라면 그 병아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병아리가 닭까지 성장하는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그렇게 키운 고작 한 마리의 닭을 6,7명이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불평이나 하진 않았을까? 크리스마스 때에 먹을 닭고기 생각과, 마당에서 같이 뛰어놀며 정이 든 닭을 잡아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행복한 갈등을 하던 운츄와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이 생각난다. 아이들에게는 지금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에 대한 행복이 있었다.
가난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 아프리카 땅에, 우리에게 없는 기쁨의 싹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늦게나마 발견하게 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