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떠오름
컬러 코드, Pantone 2361 C.
이 색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며칠 동안 냉장고에 처박혀있던 푸르죽죽하고 힘없는 가지무침? 뭐가 됐든 저 색이라면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건강하지 않은 느낌? 몽환과 슬픔 그사이 어딘가의 기분. 그렇다고 아주 차갑거나 냉혹하지는 않은 느낌.
한글로 저 색을 표현한다면 ‘회보랏빛’ 그쯤이 될 거다. 독특한 보라색에 희멀건 한 회색빛을 더해 보는 사람의 우울함을 끌어내는 색. 그런데도 꽤 명확한 ‘보라색’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색. 또 웃기는 편견일 수 있지만, 보라색은 나에게 있어 꽤 특이한 색이다. 무난함과는 아주 거리가 멀고 꽤 튀는 취향에 속하는 그런 색.
회빛에 섞인 엷은 보라색. 과연 영화 <소공녀>의 어떤 것이 이 색깔을 떠올리게 했을까?
영화의 첫 장면, 꽤 좋아 보이는 집에서 젊은 여자는 편안한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헤드셋을 끼고 노트북을 보고 있다. 그 뒤로 우리의 주인공, 미소가 등장한다. 익숙한 듯 청소를 하는 그녀의 첫 모습을 마주하며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소공녀’는 우리가 흔히 아는 ‘Little Princess’는 아니겠구나. 친구 집에서 청소를 해주고, 얼마 안 되는 일당을 받으며, 쌀까지 얻어가는 이 구질구질한 우리의 주인공은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고 ‘꼴에’ 양주도 마신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의 제목을 맞이한다. ‘Little Princess’가 아닌 ‘Microhabitat’, 아주 작은 공간에 사는 여자, ‘미소(微小)’의 이야기를.
이 영화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매우 명확히 가지고 살아가는 주인공 ‘미소’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삶은 매우 간단하게 흘러간다. 애인인 한솔,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를 위한 한약, 담배, 그리고 위스키. 아주 소박한 몇 가지만 있다면 그녀의 삶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담배 값은 오르고, 낡고 작은 그녀의 집 월세도 오르고. 모든 것이 오르다 보니 청소를 하며 삶을 이어가는 미소의 가계부는 금방 마이너스가 되어버린다. 가계부를 보며 골똘히 생각하던 미소는 꽤 마음에 드는 결론을 얻는다. ‘집을 포기하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그렇다. 인간 삶의 필수 조건인 의식주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취향을 위해 의식주를 포기해버린 미소의 삶이 터무니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누군가는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하지 못해서 한강에 텐트를 치고 사는 그녀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미소의 삶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희뿌연 회색과도 같다.
그러나 속으로 미소의 선택과 삶을 조금이라도 비웃은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렇다면 어떤 게 진짜 삶인가요?’
미소는 대학 시절 자신과 함께 밴드 활동을 했던 5명의 멤버를 차례차례 찾아간다. 그곳에서 만난 멤버들은 우리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혹은 우리 자신일지도 모르는 현실, 그 자체들이다. 대학 시절 미소와 그들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열심히 담배를 피웠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말한다. “그 사랑 참 염치없다고.”
끈질기게 의식주를 붙잡고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삶은 어떨까? 스스로 링거를 맞춰가며 회사 생활을 하는 문영, 좁은 시댁에서 주부로 살아가는 현정, 아내와 이혼 후에 20년간 100만 원씩 갚으며 혼자 살아갈 대용, 가족 모두가 자신의 결혼에 혈안이 되어 있는 록이, 거대한 저택에 살지만, 남편의 눈치로 갑갑한 삶을 사는 정미. 미소의 발걸음을 따라 다섯 명의 삶을 둘러보고 나니 이제는 진짜로 그 답을 모르겠다.
이러한 미소의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설득하기도 하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의식주조차 온전하게 가질 수 없는 현실에서의 ‘변명’ 같은 이야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선택보다는 포기로 이루어진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반성’ 같은 이야기이다. 뭐가 됐든 중요한 건 좋아하는 걸 위해 의식주를 포기해야 하는 미소의 삶이나 의식주를 위해 좋아하는 걸 포기해야 하는 다른 이들의 삶 둘 다 기형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왜 그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 현실에 놓여있는지, 그 둘 다 누릴 수는 없는 건지, 영화가 끝난 후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영화가 끝난 후 미소가 끝까지 취향을 지키며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었다. 아마 지금까지는 ‘취향’이나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달려왔던 나의 삶에 대한 반성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됐든 내 생각에 <소공녀>는 지금이라 사랑받을 수 있는, 또한 현실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이들로 구성된 현대에 사랑받아야만 하는 그런 영화이다. 아직 ‘현실’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소심해져 버리는 나는 ‘미소’가 내가 아니기에 응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삶과 취향과 자아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야만 한다는 것은 안다.
영화의 마지막. 새하얀 머리를 하고, 담배를 손에 들고, 여전히 위스키를 마시는 그녀는 한강에서 텐트를 치고 살아간다. 그 뒤의 서울의 풍경은 ‘회보랏빛’이다. 묘연한 느낌으로, 묘연한 색으로 그녀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사람답게 사는 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