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인문극장 2019 공연 #3
‘아파트’는 오늘날 한국을 상징하는 가장 보통의 건축물이 되었다.
급격한 경제성장 속에서 때로는 욕망과 성취의 대상으로, 때로는 차별과 좌절의 공간으로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파트가 한국의 주요 거주양식으로 되기까지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파트 키드’란 새로운 개념이 생기고, 아파트를 동시대 한국의 미로 탐구하는 사람들, 아파트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 또한 생겨나고 있다. <포스트 아파트>는 이러한 아파트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경험, 이상과 가능성을 새로운 형식의 공연으로 살펴본다.
Synopsis
여러 문화와 인종의 만남, 세분화된 직업과 계층, AI를 포함한 다양한 인격의 등장은 새로운 관계들의 탄생을 예고한다. ‘지혜로운 관계 맺기’를 위해 우리는 아파트에게 어떤 역할을 맡겨야 할까. 아파트는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지금 아이들이 우리의 자리에 도착하고, 우리가 부모들의 자리에 도착했을 때, 그때도 아직 남아있거나 혹은 사라져 버린 감각들이 있다면 그때는 무엇으로 인해 사랑하거나 외롭게 될까.
<포스트 아파트>는 아파트를 중심으로 파편화된 한국의 기억들을 나열한다. 대통령 연설을 통해 정치적 욕망이 퇴적된 결과로써의 아파트를 말하기도 하고, 충정아파트나 종암아파트와 같은 한국의 아파트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들을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인간에게 ‘불’이라는 도구가 생긴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어 생존의 공간으로써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며, 고독사 보험이라는 서글픈 소재를 통해 지금의 무관심함, 폐쇄성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사로 이루어지는 연극의 장면들은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어 대부분 아파트의 서글픈 파편들을 보여줬지만, 서로 엉기고 기대고 붙잡아주는 무용들은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의 따뜻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결국 노란 평상에 정착한다. 수많은 이들의 정치적 욕망, 자본주의적인 폐쇄성이 중첩되어 거대하게 들어섰던 아파트는 이제 과거가 되었다. 그 아파트가 무너진 공간에, 보기만 해도 시리도록 허한 공간에, 노란 평상이 자리한다. 회색의 공허한 터에 노란 평상은 작지만 시선을 끄는 강렬함이 있다. 그 평상 위에서 인간들은 다시 움직인다. 곧 떨어질 것 같은 타인을 잡아끌고, 한 몸이 된 것처럼 뭉치기도 하면서. 거대한 아파트는 돌고 돌아 그 작은 평상, 작은 공간에서 다시 시작된다. 모든 것의 과도기인 지금, 현재로 흘러오던 것이 과거가 되기 직전인 이 시점은 ‘포스트 아파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임이 분명하다.
작게는 당장 ‘고독사 보험’이라는 것을 들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싶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절망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존재가, 스스로의 필요성을 잃어 우리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고독사 보험이 사라지기 위해 앞으로의 아파트는 적어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생(生)의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비좁은 사각형 안에 어떻게든 낙오되지 않으려 꾸역꾸역 살아가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공간. 그래서 다른 이들과 나로 채워진 공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존재.
더 이상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이름이 또 하나의 바코드가 되어 나의 가치를 책정하는 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에 처음 ‘현대 아파트’가 생기면서 이제 우리의 집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특정 브랜드나 기업의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사실 적나라하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척 눈 감는) 돈으로써의 계급이 나를 수식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이제는 아파트가 인간의 자본주의적 위치나 가치를 대변하는 곳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대변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나와 ‘다른’ 이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호기심을 부른다. 지금의 아파트는 부엌 위에 부엌, 거실 위에 거실,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계급으로 나누어져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 그래서 옆집이 궁금하지 않은 공간인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사는 곳과 똑같은 구조의 사각형 안에서 비슷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레 들 테니까.
삼엄한 경계를 허무는 것은 결국 경계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나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아파트라는 공간은 각자의 생을 대변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