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니 Jan 16. 2024

마지막 사랑니

누구나 잇몸에 나사 서너개쯤 품고 있다. 

선천적으로 영구치가 두 군데나 없다. 유치로 견뎠는데 겉보기엔 영구치처럼 자라서 유치인 줄도 몰랐다. 대신 뿌리가 없으니 쉽게 상하고 결국 임플란트를 해 넣게 되었다. 그렇게 영구치도 없는 주제에 쓰잘데 없는 사랑니는 아래위 4군데 모두 튼튼하게 자라났다. 

염증이나 통증을 일으키는 순간 가차 없이 뽑아버렸고 이제 딱 하나 남은 사랑니를 지난 목요일 해치웠다. 

정작 필요한 건 옆에 없고 필요치 않은 건 굳이 생겨나는 게 인생인가 보다.



원시 수렵시대 인류의 조상들이 익히지 않은 질긴 음식을 먹을 때 요긴했던 사랑니는 현대인에게는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 발치하게 된다. 

젊을 때 미숙한 치과의사에게 아래 사랑니 발치를 맡겼다가 거의 초주검이 되었던 경험이 있어서 아프기 전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이번에 염증이 생기고 부어서 할 수 없이 발치를 하게 되었다. 선배 남편에게 능력 있는 구강악안면외과 전문의를 소개받았다. 경험 많은 의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수술이니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를 일. 누구는 개인병원에서 발치하다가 난수술 끝에 구급차에 실려 대학병원으로 갔다는 말까지 들은 터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없이 찔러 넣는 마취를 위한 주삿바늘, 이빨 가는 소음과 냄새, 능숙한 간호사가 조심성 없이 함부로 입을 벌리고 턱을 잡고 석션을 하고 기구를 다른 쪽 입 끝에 걸쳐놓아서 그쪽이 더 아픈 순간들을 참아내며 별일 없기만을 바랐다. 얼굴에 천이 덮혀진 채로 입을 벌리고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통증이 적기를, 의료진이 실수하지 않기를, 의사가 힘이 세기를.....

사랑니가 비스듬히 누워있어서 네 조각이나 잘라서 뽑았다고 한다. 40분가량 걸린 것 같다. 

오랜 시간 긴장한 탓이었나 배는 왜 그렇게 고픈지... 쌀죽을 끓여 먹고 항생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는 쑤시고 턱은 얻어맞은 듯 아프고 멍도 들고 한쪽 볼이 왕사탕을 문 것처럼 퉁퉁 부어있다. 

약속도 다 미루고 병원에 다녀온 후 내내 잤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남편이 사 온 죽만 먹고 누워서 침대에 가로 누었다 세로로 누었다 뒹굴거리며 종일 영화만 봤다. 그렇게 뭘 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내처 놀고 있으니 참 좋았다. 늘 뭔가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퇴직한 지금까지 따라다닌다. 



원래 사랑니는 인간의 수명이 30살 정도였던 선사시대 맞춤형 이빨이란다. 18살 정도가 되면 이가 거의 썩고 빠져서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사용하라고 나온 용도라는데 뭐 치과의사의 말이니 믿어야겠지. 칫솔질을 하지 않던 시절에 이가 한 두 개 빠지면 그때 짠하고 나타나 임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예비타이어 같은 존재였나 보다. 그런데 요즘은 다들 관리를 잘하니 먼저 난 이가 빠지는 일이 없고 뒤늦게 올라와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랑니는 사춘기 애들처럼 문제를 일으키는 거라고 봐야겠다. 



진료의자에 누워있으면 눈앞 모니터에 나보다 앞서 치료를 받은 사람의 X-ray 사진이 보인다. 68세의 이 남성은 임플란트를 10개나 해 넣었다. 내가 일찍 임플란트를 했을 때 친구들은 벌써 임플란트를 하느냐고 놀랐다. 그러던 친구들이 어느새 3-4개의 임플란트치아를 가지고 있다. 다들 멀쩡해 보이지만 누구나 잇몸에 나사 서 너개 쯤은 품고 있는 거다. 

칫솔질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이 나이 때쯤 성한 이빨이 없었을 것이다.  식후 3분 이내 양치질이 습관이 되어 다들 관리를 잘하는데도 세월에 장사 없다는 게 맞는 말이라는 걸 요즘 실감한다. 건강을 자신하는 게 아무 의미 없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불멸의 인간 스트룰드브루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태어날 때 왼쪽 눈썹 바로 위에 원형의 붉은 점이 찍힌 아기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죽지 않을 뿐이지 영원히 늙어간다. “90세가 되면 그들은 치아와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다. 음식의 맛을 구별할 수 없지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식욕도 없으면서 먹고 마신다. 그들의 지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고 여전히 계속된다.”

이쯤 되면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드라마 도깨비의 공유모습으로 영생을 누리는 게 아니라 머리와 이빨이 모두 빠진 채 요양원에 누워 끊임없는 돌봄을 받으며 영원토록 살아간다는 것 너무 끔찍한 일 아닌가. 



눈썹 위에 점이 없음을 무척 다행으로 여기며 이마를 한 번 쓸어본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골치 아픈 사랑니를 시원하게 제거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삶에는 위험이 따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