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40년이라는 시간, 참.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입니다. 그 유연한 시간 속에서 같은 시간을 걸어온 대부분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적어도 나의 이십 대는 좀 더 길지 않을까?.’ ‘나의 삼십 대에 좀 더 머무르고 싶다.’라고.
아직 이십 대를 걷는 중인 청년들은 정말 그 나이가 되면 이런 생각을 하느냐고 묻겠지만, 사실 그런 생각으로 20대와 30대를 지나온 지금의 나 역시 아직도 ‘나의 사십 대는 조금이라도 느리게 걷고 싶다고 희망 섞인 자문을 하곤 합니다. 이런 자조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오늘도 질문 같은 대답을 내놓는 사십 대의 나는, 이런 이상하고도 해괴한 질문을 매일 던지는 우리의 모습이,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가장 인간다우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대답해 봅니다.
어릴 적 교복 입은 우리를 보며 어른들이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나도 아직 열여덟 그때 같은데~’ 라는 아쉬움이 가득한 한 문장. 그때 들었던 말들을 나도 모르게 내뱉고 있는, 오늘을 사는 저는 벌써 마흔둘이 되어 어느새 두 아들의 엄마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흔둘이라는 나이와 엄마라는 타이틀은 -특히 <엄마 말을 잘 듣는> 아들 둘의 엄마라는 것은- 종종 완벽하다는 오해를 사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이 둘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직 사람들을 만나는 게 무섭고 서툰데…….’
결정해야 하는 일들과 책임져야 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은 이렇게 무섭고 때로는 두려움을 느끼게도 합니다. 사실, 십 년이 넘은 결혼 기간에 남들이 겪지 않았을 일을 겪으면서도 무리하게 견뎌왔던 이유는 그 결정과 책임에 대한 중압감을 아주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한 반칙은 아니었을지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동시에 내 인생을 스스로 챙기면서 두 아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과 두려운 감정들은 남은 결혼 생활 즉, 나의 남은 인생을 숨 막히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많든 적든 경제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엄마의 경제적인 능력과 직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두려움들이 육아 기간 중 가장 바쁘고 힘들다는 큰아이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요.
제가 가장 힘들고 불안한 시기에 다시 일을 시작한 것처럼, 흔히 말하는 나쁜 일 –감정이든 느낌이든- 이 정말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어요.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일을 시작하다니, 누가 쉽게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그때의 나에게 박수 쳐 주고 싶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있다.’라는 자연의 법칙은 불안함과 두려움을 실행력으로 바꿔주었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새치가 올라오기도 하고, 매일 아침 눈 뜨기가 싫어지는 감정들을 느끼곤 하는, 이런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책임감을 지닌 역할은, 때로는 정수리 위에서 탄산이 솟아오르는 듯한 짜릿함을 만들기도 합니다. 마치 마리오 게임 속, 스테이지마다 보스가 다른 –저의 경우에는 나, 엄마, 원장이겠지요.-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타격감을 느끼는 것처럼요. 하하하. 특히 원장 엄마라는 워킹맘 타이틀은 더 챙겨야 할 일들과 책임질 일이 많아진 역할인데, 오히려 이 캐릭터는 가끔 나태해지는 나를 더 잘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윤활유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성적표는 잔인하다, 성적은 학생의 학교 또는 학원에서의 생활을 90% 이상 반영하는 지표가 맞구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적표라는 것은, 결국 내가 공부한 것만큼의 노력의 결과가 성적으로 환산되어 성적표라는 결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어쩔 수 없이 하는 실수 또한, 결과 중 하나이므로, 성적표는 그 학생의 모든 것을 반영하는 정확한 지표입니다. 이 잔인한 성격을 지닌 성적표를 행여 낮은 점수로 받아 들게 되면 보통 세 가지 생각으로 나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잔인한 성적표를 잔인하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이지요. 이를테면 노력에 알맞은 대가라던가, 그 점수로도 충분히 만족하거나요. 하지만 대부분은 잔인할 만큼 낮은 점수를 받아 든 사람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지요. ‘왜 점수가 이렇게 나온 거지? 실수했나? 어떻게 성적을 올리지?’라는 긍정과 반성 또는 ‘성적이 이렇게 나온 건 어쩔 수 없어. 나는 해도 안 되나 봐.’ 같은 자책과 후회. 물론, 두 가지 생각 모두 자연스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누구도 어떤 생각이 맞고 틀렸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다를뿐더러 입장도 모두 다를 테니까요.
저 역시 두 가지 생각을 겪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두 생각은 다른 경험을 하게 하고,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긍정의 생각을 가지고 실수를 확인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시 공부했을 때의 다음 성적표는 확실한 성적 향상을 보여주었지만, 자책과 후회로 준비한 다음 시험의 성적표는 오히려 더욱 하락한 성적표를 받게 된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매번 긍정의 생각을 가질 수 없었기에 때로는 부정의 생각으로 가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한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간도 많이 들이고 비용도 참 많이 들인 지난 10년의 인생 공부는 어느 때보다 너무 힘들고 지쳤던 시험 기간이었어요. 자책하던 시간을 매번 긍정적으로 바꾸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책을 견디고, 버티고, 지워냈는지 모릅니다.
‘40대는 본인의 얼굴에 책임져야 하는 나이’라는 말이 있지요. 자신의 마음가짐과 인격이 얼굴의 표정으로, 분위기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마치 성적표처럼요. 이처럼 마흔둘의 지금의 저는 어떤 성적표를 받았고 어떤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제 성적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100세 시대에서 40대는 아직 공부할 시간과 최종 성적을 바꿀 기회가 많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인생 성적표의 성적을 더 올리기 위해, 수시로 보게 되는 시험에서 실패와 실수를 점점 줄여가기 위해, 오늘도 여전히 영양제도 챙겨 먹고, 마음 관리도 하면서 인생에 대한 고민 즉,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생 공부라고 말하니, 마치 오래 산 사람처럼 느껴지네요. 아까 말했듯이 이제야 새내기 40대인걸요. 하하
“인생 공부”
인생 공부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흔히 시간이 흐른다고 말하잖아요. 그렇습니다. 시간은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저는 다가오는 시간을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만이 누릴 수 있는 이 소중한 시간을 ‘그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합니다. 지난 시간보다 더 열심히 사는 나를 위해 지금, 이 시간을 행복한 시간, 아름다운 시간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누군가는 늦었다고 말하는, 또 다른 누군가는 늙어가는 시간이라 말하는 시간일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저는 다시 한번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직, 청춘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