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장편소설/ 북북서가
p.26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는 '인공지능의 윤리적 선택'을 주제로 받은 아빠식 작명법이었다. 늘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어 마치 깊은 사색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데카르트, 정확한 스케줄에 따라먹고 자고 싼다고 해서 칸트라고 명명되었다.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툭하면 밀어 떨어뜨리는 녀석은 마치 낙하 시험을 하는 것 같다고 하여 갈릴레오가 되었다. 내 이름 '철이'도 '철학'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p.82 "휴머노이드는 기본적으로 모바일 컴퓨터야. 인간보다 훨씬 탁월한 계산 능력, 암기력, 과학적 추론 능력 같은 걸 기본으로 갖고 있지. 게다가 휴머노이드의 뇌는 네트워크에 상시적으로 연결해 필요한 정보를 검색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인간이 이들을 친근하게 느끼게 하려면 이런 능력을 적당한 수준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어."
...
"철아, 너에게는 엄청난 능력이 있어. 하지만 모든 소중한 것들이 그렇듯 잘 숨겨져 있단다. 네가 잠재력을 찾아내어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넌 타고난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야. 그러려면 그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걸 잘 통제할 수 있어야 해...."
p.83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p.98 "소비자들은 한번 다른 집에 입양됐던 중고 휴머노이드 아이는 원하지 않거든. 성격이 이미 형성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파양 된 걸 보면 성격에 문제가 있을 거라 넘겨 짚기도 하고...... 그들은 사용감이 없는 아이만 원해."
p.148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고통의 근원인 자아가 아예 없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태어나게 되어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은 해악입니다. 태어나지 않는 쪽이 분명히 낫습니다. 기쁨도 느끼니까 그 유익으로 고통의 해악이 상쇄될까요?..."
p.156
휴머노이드라는 종은 인류가 예상하지 못한 경로를 통해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기계의 승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측돼 왔던 바이지만, 그게 노후화된 기계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요양원에서, 그것도 그 작업을 수행하는 휴머노이드들이 자기 마음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p.160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집중하세요.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근들은 늘 불행한 것입니다...."
p.204
끝이 오면 너도 나도 그게 끝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p207
내가 기계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았다.
p.222
나는 선이와 나누는 이런 이야기들이 언제나 좋았다. 선이의 시선은 늘 아주 먼 곳을 향해 있었다. 내가 눈앞에 닥친 뭔가로 전전긍긍할 때, 선이는 무한대의 관점에서 우주의 시간으로 생각했다. 그때도 이미 선이 에게는 영적인 기운이 넘쳤다.
p.288
"현실 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 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p.290
선이는 늘 죽음이 아무거도 아니라고, 우주정신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믿었지만, 갑자기 닥쳐온 선이 와의 작별을 받아들이는 일이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작별 인사를 읽는 내내 휴머노이드인 철이는 사람인 걸까 로봇인 걸까? 철이 본인도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사람처럼 먹고, 잠도 자고 심지어 꿈도 꾸고 다치면 아프기까지 한데 사실은 휴머노이드이다. 나의 육체가 노화되어 나의 정신을 휴머노이드에 심어두면 그것은 나인가 아닌가... 이제 머지않은 미래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