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끝나고 남은 건, 기다리던 나였다
공연이 끝난 뒤의 공기는 묘하게 팽팽하다. 방금 전까지 수천 개의 불빛과 목소리가 하나의 파동처럼 진동하던 공간이, 갑자기 숨을 멈춘 듯 조용해진다.
조명이 켜지고 사람들은 웅성이며 출구를 향해 움직이지만, 그 소리조차 이상하게 멀게 들린다. 그 순간 나는 무대 위를 바라보며, 몇 초 전까지 존재하던 세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더디게 실감한다.
2009년의 여름, 그들의 노래는 끝을 예고하지 않았다. 락페스티벌의 거대한 무대 위, 리암과 노엘이 한 프레임 안에 서서 'Live Forever'를 부르던 그날, 나는 그 장면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음악은 내게 밴드의 세계를 열어주었고, 청춘의 한 시절을 통째로 새겨 넣었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해체 소식은 마치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이후 오아시스의 노래들은 내 20대를 통과한 시간의 배경이 되었다. 'Little by Little'을 들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눈물을 훔치던, 지금 생각하면 조금 찌질했던 시절도 있었다. 세상은 너무 크고, 나는 그 안에서 작고 미숙했다. 그런데 노엘이 늙어버린 얼굴로 다시 무대에 서 있는 걸 보니, 이상하게 시간이 실감 났다. 이 사람들이 또 내한할 수 있을까,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까. 공연 중에도 기분이 묘했다. 벅차기도, 먹먹하기도 했다.
작년 11월에 예매를 했으니, 거의 1년을 기다린 공연이었다. 카톡에 디데이 위젯을 만들어두고 날짜를 세며 하루하루 설렘을 쌓아갔다. SNS에 투어 소식이 올라올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그 모든 감정이 하나의 줄 위에 팽팽히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줄이 무대의 마지막 앵콜 곡과 함께 '툭' 하고 끊어졌다.
그 찰나의 낙차, 그것이야말로 지금 느끼는 허전함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기다림이 끝났다는 건, 기다리던 나의 시간이 함께 사라졌다는 뜻이다.
존재적 허전함은 무대의 불이 켜지고 함성이 낮은 웅성으로 바뀌는 찰나에 찾아왔다. 기대, 설렘, 상상, 그리고 반복된 하루의 소소한 환희들. 그 모든 것이 공연이 끝나는 순간 공중으로 증발해 버렸다. 공연이 끝난 자리에 남은 건 이상할 만큼 가벼운 나 자신이었다.
기껏해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 열기에 잠식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일상의 중력으로 떨어지는 기분. 공기가 팽팽하게 부풀었다가 푹 꺼지는 순간처럼, 감정의 압력차가 한순간에 생겼다.
그 허전함은 꿈에서 막 깨어난 직후의 고요와 닮아 있었다. 너무 생생해서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눈을 뜨면 이미 까마득히 멀어진 꿈. 내 안의 시간대가 한순간에 바뀌는 그 공백, 그 무중력의 순간이야말로 그날의 감정이 얼마나 진짜였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차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이 리듬처럼 반짝였지만 그 리듬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었다. 어떤 열기가 식고 나면 그 자리에 낯선 고요가 찾아온다. 그것은 허전함이라기보다, 무언가를 끝까지 경험한 뒤 찾아오는 진공 같은 상태다. 흥분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남는 건 이상할 정도로 또렷한 현실감이었다.
아마 이런 감정은 살아 있는 동안 여러 번 반복될 것이다. 기다리던 어떤 순간이 도착하고, 그 절정이 지나간 뒤 찾아오는 낙차의 순간. 무대, 여행, 사랑, 계절 —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인간은 기대하며 살고, 그 기대가 끝날 때마다 잠시 공중에 떠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다시 땅으로 내려앉으며, 또 다른 기다림을 시작한다.
공연은 끝났지만, 무대의 여운은 아직 내 안에서 울리고 있다. 음악이 멎은 뒤에도 남는 잔향처럼 감정의 진폭이 서서히 줄어든다. 어쩌면 이 허전함은 슬픔이 아니라, 살아 있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진심으로 기다려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고요. 그 고요 속에서 다시 일상의 리듬을 맞춘다. 이제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만 울리는 한 시절의 잔향으로 남았기에.
“We’re all part of the masterplan.”
— Oasis, Little by Lit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