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거꾸로 흐르는 집

잊는다는 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by 그냥 하윤

이 집의 시간은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오늘의 일은 금세 안갯속으로 스며들고, 오래 전의 장면이 문턱을 넘어 돌아온다. 어제의 웃음은 허공에 흩어지지만, 먼 계절의 햇살은 여전히 손끝에 따스하다. 마치 시간의 무게가 한쪽으로 기울어, 낡은 기억만이 가라앉아 빛나는 것처럼.


대화는 종종 엇갈린다. 한쪽이 이제 막 꺼낸 말을, 다른 쪽은 이미 지나간 장면으로 받아들인다. 그래도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다. 그 어긋남 속에서 오히려 오래된 온도가 느껴진다. 사람의 기억이란 결국 완벽하게 이어진 선이 아니라, 여기저기 끊긴 실로 엮인 천 같아서, 어느 부분은 낡아 해지고 어느 부분은 유난히 단단하게 남는다. 우리는 그 해진 틈으로 서로를 들여다본다.


이따금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의 순서가 살짝 바뀌어 있다. 오래된 일들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고, 오늘의 일들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기억은 그렇게 앞뒤의 경계를 잃은 채, 자신이 머물고 싶은 자리에서 천천히 머문다. 그 느림 속에서 나는 한때 지나쳤던 장면들을 새삼 다시 배운다. 처음부터 그 안에 있던 빛을, 이제야 알아본다.


가끔은 공기 속에서도 시간이 뒤섞이는 게 느껴진다. 오늘의 햇빛이 창문을 통과해 오래된 커튼의 먼지에 부딪히면, 잠시 과거의 냄새가 피어오른다. 그 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오래 전의 오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무언가를 잊는다는 건, 어쩌면 기억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가야 할 기억이 뒤로 걸어가는 것. 그저 속도가 다를 뿐, 모두 제 나름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


돌아가는 건 판뿐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되감긴다


이상하게도, 오래된 것일수록 생생하다. 바랜 사진 속 얼굴들은 여전히 또렷하고, 잊힌 이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방금 전의 대화, 조금 전의 웃음은 공기 속으로 스며 사라진다. 가까운 일들은 너무 밝아서 쉽게 바래고, 먼 일들은 어둠 속에 숨어 더 오래 빛난다. 시간은 늘 균등하지 않다. 어떤 기억은 뒤늦게 익고, 어떤 기억은 제철을 잃는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계절을 산다.


나는 오늘을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언젠가 이 순간도 느리게 되감기겠지. 그때를 위해 지금의 공기, 지금의 온도, 지금의 빛을 마음 한켠에 접어 둔다. 언젠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오늘이 천천히 되살아날 때, 그것이 완전히 같은 모습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다. 기억은 늘 변형된 형태로 우리를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 때로는 원래보다 더 아름답다.


이 집의 시간은 여전히 조금 느리다. 그러나 그 느림 덕분에 사라지는 것들이 잠시 더 머물고, 잊히는 일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 느린 틈을 사랑한다. 오늘이 천천히 어제로 스며드는, 이 조용한 집의 호흡을.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