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프레임 밖에서 빛난다

살아 있는 동안엔 결코 볼 수 없는 '나의 풍경'

by 그냥 하윤

매일 어둠이 짙게 깔린 서울을 내려다본다. 강변북로를 따라 흐르는 불빛들이 시야를 채운다. 멀리서 보면 붉은빛과 흰빛, 주황빛이 섞여 거대한 벨벳 위에 흩뿌려진 별무리 같다.


아름답다고 중얼거리며, 무심코 스마트폰을 꺼내 셔터를 눌렀다. 잠시 후 화면에 떠오른 이미지는 그저 빛의 강물 같았다. 그러나 그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이상한 불편함이 스며들었다. 그 반짝임은 유성처럼 흘러가는 차가 아니라, 제자리에 정체된 차량들의 후미등이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 누군가가 있다. 멈춰 선 채로, 각자의 시간을 품은 채로.


우리가 보는 것은 단지 풍경이지만, 그 안에는 각자의 사연이 갇혀 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장엄한 빛의 흐름'으로만 감상한다. 그 불빛을 사진처럼 감상하면서, 그 안의 숨결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왜 거리는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바꾸는가.


어느 철학자는 아름다움이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 곧 '무관심적 관조'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아름다움은 참여가 아니라 거리에서, 철저한 객관화에서 태어난다. 고통이 나의 것이 아닐 때, 비로소 나는 그것을 액자 속의 그림처럼 안전하게 감상한다. 멀리서 바라볼 때만 아름다운 것은 결국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정제된 사진은 현실의 잡음을 배제하고 단 하나의 정지된 순간만 남긴다. 야경이 후미등을 장엄한 빛으로 바꾸는 순간, 정체된 차 안의 짜증과 한숨은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난다. 누군가의 고통을 그저 풍경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것이 관조의 시작이며 예술이 작동하는 방식일지 모른다.


제목-없음-3.jpg 멈춰 선 삶들이 모여 이 풍경을 만든다.


나는 왜 셔터를 눌렀을까. 어쩌면 그 순간, 나 자신도 '고통받는 나'를 잠시 멈춰 세우고 싶었던 건 아닐까. 관찰자가 되는 순간, 나는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살아 있는 감정이 멈추고, 순간은 완벽히 정제된 이미지가 된다. 마치 삶의 비극을 잠시 멈춰 세우듯이.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자기 삶을 아름답게 볼 수 없는 존재일까. 카메라 뒤에 서서 고통을 관조하는 시선은 언제나 타인의 몫일까.


살아내는 동안 우리는 피사체일 뿐이고, 고통은 여전히 나의 것으로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살아내는 동안엔 언제나 프레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늘 현재형이고, 그 안에선 아무것도 관조할 수 없다.


이 순간, 강변북로를 내려다보며 사유하는 나 또한 여전히 프레임 안의 인간이다. 이 숭고한 야경의 붉은 불빛은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익명의 고통이 만든 풍경이다. 나는 아직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내일이면 나 역시 저 도로 위 정체된 차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나를 제외한 자리에서 빛난다. 그러나 언젠가 이 순간의 사색이 기록으로 남는다면, 나는 이 장면 속에 고정된 존재로 남을 것이다. 빛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풍경일지 모른다. 누군가의 고통이 나에게서 멀어질 때 아름다움이 되듯, 나의 고통도 누군가의 프레임 밖에서 조용히 반짝일 것이다.


야경은 고통을 빛으로 번역한 도시의 언어다. 나는 그 언어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그 언어의 한 문장이다. 살아내는 동안 이 프레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사유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이 도시에 새겨 넣은 가장 깊은 고독의 기록일 것이다.


결국 아름다움을 좇아 시선을 던지는 이 고독함 자체가, 나의 삶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가장 비극적이고 숭고한 자화상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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