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가

기억의 바깥에서 만나는 시간들

by 그냥 하윤

길을 걷다 문득 걸음을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다. 매끄럽게 반사되는 유리 빌딩이 아니라, 페인트가 벗겨져 속살이 누렇게 드러난 담벼락, 누군가 비워두고 간 자개장 같은 것들 앞에서다. 그 사물들은 내 기억의 연표에 놓여 있지 않다. 나는 그 자개장이 호사스럽게 안방을 차지하던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마음이 먼저 그 앞에 가 닿는다. 마치 오래전 이별했던 무언가가 불쑥 되돌아온 듯한 낯선 친근함.


그 감각은 내 개인적 추억이 작동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시대의 온도가, 오래된 빛처럼 천천히 내려앉는다. 세상은 그런 마음을 ‘아네모이아’라 부른다지만, 내게 그것은 이름을 붙이지 못해 더 깊어지는 어떤 감정이다. 그 순간 시선은 내 과거에 머물지 않고, 나를 둘러싼 시간의 지층으로 확장된다.


지층은 늘 같은 모습이 아니다. 시간은 사물에 층위를 남긴다. 마모된 자리, 엷게 바랜 색, 어쩔 수 없이 비뚤어진 형태. 사람들은 그것을 '낡음'이라 부르지만, 실은 사물이 시간을 버텨낸 방식이며, 잔잔한 기파(氣波)처럼 스며든 기록이다.


본가 거실의 전축과 LP판에는 아빠의 젊은 숨결과 내 유년 시절의 저녁 공기가 고요히 가라앉아 있다. 조용필, 필 콜린스, 사이먼 앤 가펑클… 누군가의 젊은 날이 기스처럼 남아 있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따뜻함이다.


반면 황학동 시장 구석에서 만난 필름 카메라와 밑줄로 지문이 닳은 헌책은 내가 모르는 타인의 시간을 품고 있다. 누군가는 저 카메라로 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기록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저 책의 문장에 기대어 잠 못 드는 밤을 견뎠을 것이다.


흘러나오는 소리는 음악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의 숨결이었다.


그 두 종류의 오래됨은 각기 다른 서사를 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게 같은 층위로 다가온다. 한쪽은 나의 기억을 증명하고, 다른 한쪽은 내가 살지 않은 시대의 생활 방식을 조용히 증언한다. 오래된 것에 대한 애착은 결국 '기억의 확장'이다. 나의 좁은 생애를 넘어, 타인의 시간과 그들이 살았던 방식까지 내 감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그렇게 시선이 넓어질수록 낡음의 불완전함은 오히려 편안한 정적을 건넨다. 새것은 단단히 닫혀 있다. 흠집 하나 없는 표면은 어떤 발자국도 허락하지 않는다. 반면 오래된 물건의 균열과 주름은 작은 틈을 남긴다. 바람이 드나드는 틈, 이야기가 들러붙을 틈. 나는 그 틈에서 미세한 체온을 느낀다.


엄마가 내게 물려준 스물일곱 해 묵은 페라가모 가방을 본다. 손이 많이 닿던 자리가 어둑하게 변색되고, 가죽의 결은 오랜 계절을 거친 물살처럼 잔잔하게 퍼져 있다. 설명서로는 더 이상 정의할 수 없는 표면.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시대의 물건들 또한 그렇다. 오래됨 속에는 늘 여백이 있다. 빠진 정보, 사라진 사실. 그 빈틈을 메우는 것은 상상력이다. 새 물건이 명확한 기능을 요구한다면, 낡은 물건은 '생각할 시간'을 건넨다. 이 긁힌 자국은 어디서 왔을까, 이 색 바랜 얼룩은 어떤 오후의 흔적일까. 완전하지 않기에, 혹은 헐거워졌기에 비로소 내가 들어갈 자리가 생긴다.


나는 오래된 것들 앞에서 종종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도시의 뒷골목에 남은 적산가옥이나, 노이즈 섞인 재즈 음반들은 모두 '생존자'다. 수많은 것이 부서지고, 버려지고, 잊히는 동안 그들은 끝끝내 살아남아 내 앞에 당도했다. 내가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이 세상에 있었던 것들. 나의 기억이 얹히기 전, 이미 수많은 누군가의 손과 발, 그리고 삶을 지나온 존재들이다. 그 끈질긴 생명력 앞에서 나는 겸허해진다. '남아 있음' 자체가 선택받은 결과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살지 않은 시대가, 이상하게도 나를 편안하게 품어준다.


그렇다면 나는 왜 오래된 것에 이토록 마음을 기울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 기억의 바깥에 있는 시간까지 사랑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오래된 취향을 현실 도피라 말한다. 과거에의 집착이라고. 하지만 그 말은 부정확하다. 이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시간 전체 속의 나'를 발견하는 방식이다. 시대를 건너온 사물들 곁에 있을 때, 나는 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시간의 큰 흐름 속에 잠시 머무는 존재가 된다. 내가 태어난 시대 너머의 것까지 이해하고 감각하려는 몸짓. 그것은 나라는 사람의 윤곽을 조금 더 넓히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오래된 것들 앞에서 나는 종종 한 문장처럼 조용해진다. 그들은 나와 여러 시대를 통과해 지금 여기에 도달했다. 그 낡고 헐거운 여백 속에서 나는 나의 시간뿐 아니라 내가 살지 않은 시간까지 읽어내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지금 이 순간 같은 중력을 견디며 존재한다. 오래된 것들은 사라지지 않은 채 나와 겹쳐 존재한다. 아마 그건, 내가 겪지 않은 시대까지도 품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 마음이 오늘도 나의 세계를 조금 더 넓게 확장하고 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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