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연애의 정의와 권력 역학
누군가는 이 말을 설레는 순간이라 하고, 누군가는 이 말을 관계의 분기점이라 한다. 이 짧은 일곱 음절은 어느새 현대 연애의 정수를 담은 주문처럼 번져갔다.
오래전, 연애에 서툴던 시절. 나도 한 번쯤 이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친구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냥 물어봐. '우리 무슨 사이야?' 라고." 친구는 확신에 차 말했다. 마치 이 한마디가 모든 관계의 미스터리를 풀어낼 열쇠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반신반의하며, 낯선 대사를 입에 올렸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말은 내 정서에 맞지 않았다. 어색함을 넘어 조금은 불편했다. 문득, 이 말 한마디에 담긴 복잡한 심리의 풍경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같은 파도에 몸을 실었으면서, 왜 한 사람은 방향을 정의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정의를 기다려야 할까? 물살은 두 사람 모두를 떠밀고 있는데.
내가 원하는 바를 직접 말하는 대신, 상대방의 입에서 답을 기다린다는 것이 왠지 이상했다. 이 말에서 나는 종종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의 눈빛을 본다. "자, 주인님. 우리 관계를 정해주세요!" 확인받고 싶어 하는 그 애절함.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이런 자세는, 결국 스스로를 저 아래로 끌어내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은 분류하고 정의하는 존재다.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모든 관계를 명확한 카테고리에 넣으려 든다. 정의되지 않은 것들은 불안하고 모호하며, 때로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연애의 중간 지점에서 종종 이런 질문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 없는 관계가 꼭 불안한 것만은 아니다. 관계란 때로 이름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마치 즉흥연주가 악보로 고정되는 순간처럼, 때로는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는 순간 그 안에 있던 무한한 흐름과 변주의 가능성이 단 하나의 선율로 굳어버리기도 한다. 자유롭게 흘러가던 음들이 오선지 위에 붙박이가 되는 것처럼.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이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름을 찾아 헤맨다. 관계의 방향성, 깊이, 의미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 내가 혼자 느끼는 게 아니라는 확신, 상대방도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안도감을 원한다.
나의 경험은 조금 달랐다. 몇 해 전 그는 내게 연인들이나 할 법한 일들을 자꾸 제안했다. 드라이브, 당일치기 여행, 데이트.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관계란 때로 이름 없이도 존재하는 것이라 믿었으니까. 그는 하고 싶은 것들을 잔뜩 늘어놓았지만 우리가 ’커플‘이라는 확언을 한 적은 없었다.
그의 버킷리스트가 늘어갈수록, 그리고 그 항목들이 좀 더 내밀한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로 진화해갈수록,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행동은 연인 같은데, 말은 한 마디도 없는 이 괴리. 이것은 관계의 정의를 미루는 전략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두려움이었을까.
사실 이런 행동패턴은 꽤 흔하다.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면 책임이 따르고, 상처 입을 가능성도 커진다. 정의되지 않은 관계는 언제든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두는 안전장치다. "우리는 그냥 친구야", "나는 그냥 호감만 있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비상구를 확보해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호함의 전략은 결국 누군가에게 불안과 혼란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불안은 종종 폭발한다.
여느때처럼 혼자만의 미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그에게 나는 직접적으로 말했다.
"근데, 이런 건 여자친구랑 하는 일들이잖아.”
그가 순간 멈칫했다. 그제야 처음으로, 자기 발자국을 돌아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가 이 정적을 어떻게 정리할지 지켜봤다.
“진지하게 만나자고 한 적도 없으면서.”
툴툴거리듯 내뱉은 말은, 사실상 선을 그으라는 신호였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나온 말은 뜻밖에도 이것이었다.
“말하려 했는데, 타이밍을 모르겠어서..."
그렇다면, 나라도 분명하게 해야 했다.
"지금이 타이밍 같은데? 지금 해봐."
그날 나는 그렇게 해서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받아냈다'.
솔직히 말하면, 스스로도 조금 짜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가 애매한 태도로 흐리는 바람에 결국 내가 선을 그어야 했다. 질문을 던진 쪽은 나였지만, 사실 나 역시 이 관계를 이렇게 정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감정들은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데, 때때로 누군가는 억지로라도 문장을 마무리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날, 나는 그 역할을 떠안았던 것이다.
한쪽의 질문과 다른 쪽의 망설임 속에서 맺어진 관계. 그 안에서도 진정성은 있을 수 있다. 다만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서로가 동시에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한쪽이 먼저 선을 그어야 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두 사람의 감정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용기와 타이밍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우리 무슨 사이야?"라는 질문, 혹은 "나에게 사귀자고 말해"라는 말 대신, 우리는 다른 접근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너와 이런 관계이고 싶어."라는 선언. 이것은 상대방에게 권력을 넘기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바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주체적인 선언이다.
솔직한 소통은 관계의 모호함을 줄이고 서로의 기대치를 명확히 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거절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감정을 먼저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우리 무슨 사이야?"라는 우회적인 질문을, 선언 대신 택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과 원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용기는 결국 더 건강한 관계로 이어진다. 그것이 설사 원하지 않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최소한 모호함과 불확실성의 긴장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게 된다.
결국 관계의 본질은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가 느끼는 감정과 교감에 있다. "사귀는 중"이라는 레이블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얼마나 존중하는가의 문제다. 타인에 의해 정의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 그것이 진정한 관계의 모습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솔직한 대화와 진정한 교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용기야말로 모든 건강한 관계의 시작점이자 지향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