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고, 혼자 느낀 로마에서의 36시간
이번 글은 거창한 여행기라기보다는,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작은 회고에 가깝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낭만의 나라 이탈리아를 혼자 걸어보고 싶었던 20대 후반의 내가 남긴 흔적들. 솔직히 말하면 루트도, 숙소 이름도, 내가 뭘 먹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사실 한 달 전 점심 메뉴도 잘 기억 안 나니까, 몇 년 전 여행을 또렷이 떠올리기란 애초에 무리다.)
그럼에도 사진을 들여다보면 그때의 공기와 햇살, 거리의 소음, 그리고 '아, 저때 꽤 신났었지' 같은 감정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남겨두려 한다. 이 글은 그 기억들을 조심스레 되새김질한 여행의 잔향이다.
악명 높은 아에로플로트를 타고, 경유지인 모스크바에서 몇 시간을 체류한 끝에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했다. 민족 대명절인 추석 연휴에 항공권을 끊은 탓에, 선택지는 직항이 아닌 외항사 경유편뿐이었다. 직항이었다면 비행 시간만 따져 10시간 이내로 끝났겠지만, 경유까지 포함하니 하루를 통째로 비행과 대기로 보내야 했다.
공항에서 짐을 찾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고, 몸은 이미 비행기에서 녹초가 된 상태였다. 기내식은 역시나 별로였고, 입맛에도 피로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밴을 타고 숙소에 오니 이미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배는 고팠고, 낯선 골목에서 문을 연 가게는 하나뿐이었다. 숙소 바로 앞에 자리한 작은 펍. 문 앞에 노란 조명이 아늑하게 퍼지고 있었고, 안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조용히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메뉴판을 뚫어지게 읽을 기력도 없어서 그냥 되는 대로 시켰다.
유색인종의 종업원이 음식을 서빙해 주며 물었다. "혼자 여행 왔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원래 자기도 여행객이었는데, 이탈리아에 정착한 지는 몇 년 됐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몇 마디 스몰토크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서로 다른 언어와 시간 속에서 스친 짧은 대화였지만, 그 밤의 공기와 함께 또렷이 남아 있다.
밤 늦게 간단한 요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는 레푸블리카 광장역 인근의 B&B였다.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숙소로, 세 개의 방을 여러 투숙객이 나눠 쓰고, 부엌과 거실은 공동으로 함께 쓰는 구조였다.
숙소에는 매일 아침, 작은 부엌 한쪽에 조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시리얼과 토스트용 빵, 스프레드, 인스턴트 커피와 티백. 유럽 소도시의 B&B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전형적인 구성임에도 그 소박함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아무도 깨우지 않는 아침, 조용한 부엌에서 혼자 커피를 타 마시며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특별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숙소의 거실이었다. 각종 조각상과 회화, 태피스트리로 가득한 인테리어는 마치 작은 개인 미술관 같았다. 호스트의 취향이 집 안 구석구석에 녹아 있었고, 그 애정이 공간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는 이 거실에 꽤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종종 마주칠 때마다 내 집 예쁘지 않냐는 눈빛으로 말을 건네곤 했다.
3일간 머무는 동안 호스트는 언제나 친절했고, 말수는 적었지만 미소가 많았다. 다만 마주칠 때마다 볼에 인사를 남기는 이탈리아식 인사에 적응하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동양인의 기준에선 다소 낯선 거리감이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 또한 이 도시에서 겪은 수많은 경험 중 하나로 남았다.
로마 첫째 날의 일정은 바티칸 투어였다. 단체 여행이면 늘 가이드를 멀찍이 두고 혼자 구경하다가 집합 시간에만 슬쩍 나타나는 청개구리였는데, 이번엔 달랐다. 출발 전부터 가장 기대했던 코스였던 만큼, 가이드 옆을 사수하며 설명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따라다녔다.
투어는 베드로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거대한 기둥들이 둥글게 감싼 광장은 상상보다 훨씬 넓고 고요했고, 정중앙의 오벨리스크와 분수까지 모든 요소가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어진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눈을 어디에 두든 화려한 장식과 조각, 황금빛 제단, 끝없이 뻗은 천장이 시야를 채웠다. 인간이 만든 공간이 이토록 성스럽고 경건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압도적이었다. 투어 인원 중 유독 키가 컸던 남자가 이동할 때마다 계속 내 앞에 서있었던 것만 빼면.
그 사람은 이동할 때마다 신기하게도 계속 내 앞에 서 있었다. 게르만족 수준의 키에 어깨까지 넓어서 내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투어 내내 내 시야를 차단하는 최적의 위치를 찾아내는 덕분에 중요한 조각상과 작품을 볼 때마다 '와 대단하다. 근데 안 보인다..' 를 반복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이게 바로 중세 시대 평민들이 귀족들 사이에서 성화를 보던 느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 평민의 기분을 체험해 본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그래도 다시 온다면 맨 앞자리를 사수해야지.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가장 먼저 ‘피에타’ 앞으로 다가갔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섬세했고, 슬퍼보였다. 조각이 아닌, 감정을 지닌 한 사람이 거기 앉아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단단한 대리석 위에 새겨진 근육과 옷자락의 표현은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했다. 손끝의 디테일, 피부의 질감, 천의 주름이 흐르는 방향까지... 도무지 이것이 돌을 깎아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누군가가 돌 속에 숨겨진 생명을 꺼내놓은 듯한 작품. 보는 순간, 경외감에 가까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서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눈앞에 펼쳐졌다. 높은 천장을 가득 메운 서사,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물들, 붓질이 아니라 감정이 튀어나올 것 같은 색감. 나는 목이 뻐근한 줄도 모르고, 한참을 올려다봤다. 그 높은 곳에서 몇 년 동안이나 머리를 뒤로 젖힌 채 그림을 그렸다는 미켈란젤로의 이야기가 갑자기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림을 보는 행위 자체가 경이로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혼자 여행한다고 떠나온 로마였지만, 나는 이틀 동안 한국인 투어 상품을 두 번이나 이용했다. 하루는 바티칸 투어, 또 하루는 로마 야경 투어였다. 자유 일정 전날 밤에 다녀온 야경 투어는, 지금 생각해도 꽤 탁월한 선택이었다.
처음엔 낯선 골목길을 혼자 헤매기보단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신청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혼자였으면 놓쳤을 풍경들을 많이도 보게 되었다.
로마의 밤은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거리도 어두운 조명이 내려앉으면 조용한 돌길이 되었고, 햇살 아래에서는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건물들이 밤에는 깊은 숨결을 머금은 채, 서사시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주요 명소들을 빠르게 훑고, 가까운 구간은 걸어서 이동했다. 콜로세움에서 시작해 포로 로마노, 베네치아 궁, 그리고 천사의 성까지. 이름만 들어도 숨이 찰 것 같은 코스였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걸었다. 그리고 걷는 동안 로마는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밤이 내려앉은 콜로세움은 낮보다 훨씬 더 신비로웠다. 내부에서 퍼져 나오는 따뜻한 조명이 거대한 곡선 틈을 타고 흘러나왔다. 조용히 숨을 고르듯 빛을 내던 그 풍경은, 한때 검투사들의 피와 외침으로 가득 찼던 공간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만들 만큼 고요하고도 경이로웠다.
천사의 성에서는 테베레 강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다리를 건너며 바라본 강 위의 조명들은 마치 도시 전체가 나지막한 별빛으로 수를 놓은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발소리마저 잦아든 그 시간, 로마는 조용한 영화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이틀 동안 하루 평균 2만 5천 보. 다리가 땅에 닿는 게 느껴질 정도로 지쳤고, 신발 안쪽은 마치 누군가 사포를 깔아놓은 것처럼 따끔거렸다. 하지만 모든 일정을 마치고 침대에 몸을 던지는 순간마다, 머릿속을 맴돌던 마지막 문장은 늘 같았다.
“그래도 로마의 밤은, 걷지 않고서는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다음 날은 정해진 일정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니는 날이었다. 원래도 큰 그림만 정해두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라, 이런 흐름이 내겐 가장 자연스러웠다. MBTI로 치면 P의 정수랄까.
기억을 더듬자면, 아침 겸 점심으로 한 가게에 들어가 파스타 한 접시를 주문했다. 딱히 유명한 맛집도, 평점을 찾아본 곳도 아니었다. 그냥 걷다가 괜찮아 보여서 들어갔는데, 그런 선택이 가능한 것도 로마의 매력이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어지간한 가게는 기본 이상은 해낸다. 접시에 담긴 건 아주 심플한 토마토 소스 파스타였던 것 같은데, 그 담백함이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로컬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했다. 여행 전부터 이탈리아 마트에서 꼭 사야 한다는 리스트를 나름 모아두었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뭐든 다 사고 싶어졌다. 바질 페스토, 트러플 감자칩, 모카포트, 원두,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소금까지. 장바구니는 금세 무거워졌지만, 기분 좋은 무게였다. 물건을 고르는 동안에도 여행자의 실감은 점점 더 짙어졌다.
저녁 무렵에는 다시 콜로세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트레비 분수와 명품 거리, 스페인 광장까지 이어지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야경 투어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그날은 가이드와 함께 여럿이 명소를 돌았다면, 이번엔 오롯이 혼자만의 리듬으로 로마를 느낀 시간이었다. 거리 공연을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풍경 앞에서는 잠시 멈춰 사진을 남겼다.
이날 기억 중 인상 깊었던 건, 콜로세움 앞에서 생긴 작은 에피소드였다. 팔찌를 강매하려는 상인에게 얽혀 허둥대고 있던 찰나, 한 동양인 남성이 나를 도와줬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한국인 유학생이었고, 로마에 거주한 지 3년째인 스냅 작가라고 한다.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도움을 주고받은 인연으로 우리는 반가움의 이야기를 나눴고, 그 친구는 관광객들이 잘 모르는 예쁜 포토 스팟과 자신만의 단골 젤라또 가게를 알려주었다.
그 가게의 이름은 라 로마나(La Romana). 피스타치오와 복숭아 맛을 골라 한 스푼 떠먹는 순간, ‘아, 이건 진짜다’ 싶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크리미한 질감에 쫀쫀함까지 더해져, 여태 먹어온 젤라또와는 차원이 달랐다. 졸리띠나 파씨 같은 유명 체인보다 훨씬 만족스러웠고, 무엇보다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여행 중 들렀던 수많은 가게들 대부분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한데, 이곳은 여전히 또렷하다. 아마 마음 깊이 찍힌 장소란 이런 걸까?
농담이 아니라,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1일 1젤라또를 실천했더니 한국에 돌아올 땐 체중이 4kg이나 늘어나 있었다. (아주 정직하고 값진 무게였다..)
트레비분수 앞 명품 거리에서는 색소폰을 연주하던 한 연주자와 마주쳤다. 쇼윈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조명이 거리 바닥을 은은하게 물들이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불던 색소폰 소리는 깊고 부드러웠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고, 어떤 이들은 쇼윈도 앞에 조용히 기대어 서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압박도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일. 낯선 도시의 밤, 익숙하지 않은 거리에서 마주한 짧은 연주 하나가 내게는 작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야경을 배경으로 남긴 사진 속에서, 나는 여전히 여행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진 속 나는 꽤 들떠 보인다. 아마 그날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겠지.
사진 속의 긴 갈색 웨이브 머리, 그땐 분명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어딘가 낯설다. (지금의 나는 세팅한 긴 머리보다 손질이 편한 단발을 고수하고, 실루엣이 드러나는 옷 대신 바람이 잘 통하는 소재의 옷을 선호한다.) 마치 시간이 흐르면서 사진 속의 나와 현실의 내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것만 같다.
그날의 감정들은 여전히 선명하지만, 그 순간을 살았던 나는 이제 사진 속에만 남아 있는 듯하다. 시간이 더 흐르면, 지금 이 순간도 또 다른 감정으로 기억되겠지. 그게 여행의 힘이자, 시간이 하는 일인 것 같다.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걷고 멈추고 또 걷는 하루.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대화,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의 감동, 익숙하지 않은 거리에서 건져 올린 짧은 장면들. 그렇게 로마에서의 가장 낭만적인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