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도시, 그리고 혼자의 시선
로마에서의 3일을 뒤로하고, 나는 피렌체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는 남부였지만, 집에 돌아가는 비행기는 로마에서 탈 예정이었기에 큰 캐리어는 로마 B&B에 맡기기로 했다. 짐이 줄어드니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처음엔 내 키만 한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녔는데, 이제는 기내용 캐리어 하나만 달랑. 여행이란, 점점 짐을 덜어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레푸블리카 역에서 이딸로 열차를 타기 위해 테르미니 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걸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여행 후반부의 체력은 언제나 오차범위 안에 있었다.
셀카 삼매경에 빠져 있던 그 순간, 한 중국인 아저씨가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순수한 호의 같아서 감사한 마음으로 카메라를 건넸지만, 하필 그 타이밍에 눈을 감고 말았다. 여행자의 표정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다.
여행 내내 소매치기를 경계하며 삼각대를 조심스레 꺼내고, 또 허겁지겁 철수하길 반복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사진을 부탁할 때는 대체로 동양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나만의 통계지만, 한국인 관광객은 사진을 ‘잘’ 찍고, 중국인 관광객은 ‘아주 잘’ 찍는다.
테르미니 역은 로마의 중심이자 모든 여정의 시작점 같은 공간이었다. 안내 방송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어로 흘러나오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긴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 각자의 시간에 몰두해 있었다. 나는 전광판만 계속 올려다보며, 플랫폼 번호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의 공기에는 묘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대부분의 로마 여행자들이 이 근방에 숙소를 잡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교통이 편리하고 중심지와 가깝다. 하지만 혼자 다니는 여자 여행자에게는 ‘치안’이라는 또 다른 우선순위가 있었다. 나는 조금 더 한적하고 덜 위험해 보이는 레푸블리카 쪽에 숙소를 골랐고, 다행히 그 선택은 꽤 만족스러웠다.
플랫폼 전광판에 피렌체행 이딸로가 도착 예정이라는 글자가 떴고, 나는 흐르는 사람들 틈에 몸을 맡겼다. 열차에 오르자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바깥 풍경이 미끄러지듯 흘러가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따뜻했고, 회색빛 로마의 거리들이 점점 초록빛 들판으로 바뀌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시간 반쯤 걸려 드디어 피렌체에 도착했다. 르네상스의 심장,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숨 쉬던 도시. 그냥 스쳐 지나칠 법한 작은 건물조차 수백 년의 시간을 품고 있었다. 골목마다 세월의 결이 살아 있었고, 도시 전체가 마치 살아있는 박물관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약속 장소에서 상대를 애타게 기다리던 그 순간. 그 장소를 언젠가는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상하이와 홍콩에서 장국영 투어를 하던 마음처럼, 나에게 여행은 종종 성지순례에 가까웠다.
도착하자마자 스테이크로 허기를 채우고, 곧장 두오모 성당과 조토의 종탑에 올랐다. 둘째 날은 더몰 아울렛에 들렀다가 바로 남부로 이동할 예정이라, 이 도시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뿐. 아쉬운 만큼 밀도 있게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조토의 종탑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처음엔 ‘이 정도쯤이야’ 하고 가볍게 입구를 통과했지만, 곧 후회했다. 입구와 출구가 같은 계단이라 올라오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이 좁은 통로에서 몸을 부딪치며 지나가야 했고, 계단은 천 개가 넘었다. 10월인데도 더웠고, 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악전고투 끝에 도착한 종탑 정상. 눈앞에는 피렌체의 붉은 지붕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두오모의 거대한 돔은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멀리 아르노 강도 흐르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눈앞의 풍경에 몰입하던 그때, 두오모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기를 갈라 울려 퍼지는 묵직한 울림은 아래에서 들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도시 전체가 그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듯한 순간.
공기 속을 가르는 깊고도 웅장한 울림은 아래에서 들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도시 전체가 그 울림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그 고생을 해서라도 올라오는구나 싶었다. 무릎이 후들거리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힘들었지만 이 순간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종탑에서 내려오자마자 광장에서 젤라또를 하나 주문했다. 점원은 자꾸 “곤니찌와~” 하며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메이크업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작은 내 체구 때문이었을까. 전부터 해외에선 종종 일본인으로 오해받곤 했는데, 한국인이라고 정정했음에도 그 직원은 계속 일본어를 반복했다. 웃으며 넘기기엔 살짝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로마의 스카프 강매꾼, 팔찌 강매꾼에 이어, 피렌체에서는 장미 팔이까지 등장했다. 내가 그렇게 지갑을 잘 열게 생겼나? 그 와중에 4유로를 요구하길래, 2유로로 깎아달라고 흥정까지 해버렸다.
네. 그래서 저는... 꽃 한 송이를 2유로에 구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해질 무렵, 나는 베키오 다리를 걸었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자,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났다는 그 장소. 단 한 번의 만남으로 평생 그녀를 사랑했고, 그 감정을 고스란히 '신곡'에 녹여냈다. 사랑이라는 건 때론 아주 짧은 찰나에 시작되기도 하나 보다.
물론 나와 '신곡'의 인연은 조금 달랐다. 읽다가 몇 번이나 덮어버렸고, 세 번째 도전 만에야 간신히 완독 했다.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품은 순정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끈기로 읽어낸 책이라 그런지 이 도시의 공기가 조금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단테가 사랑에 빠졌던 그 다리 위에서 나도 잠시 멈춰 서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모처럼 사색...을 하고 싶었지만, 해가 지기 전에 미켈란젤로 언덕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금세 현실로 복귀. 빠르게 택시를 잡아타고 언덕으로 향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 도착한 건 정말 아슬아슬하게, 노을이 막 지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하늘은 완벽에 가까운 색을 보여주었다. 피렌체의 붉은 지붕들과 두오모 성당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 그날따라 공기가 맑고 하늘은 투명했다. 여행 전 일주일을 착하게 살아온 덕일까, 모든 운이 이 순간을 위해 몰려든 것 같았다.
해가 질수록 하늘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도시 위에는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두오모 성당의 흰 대리석 외벽은 어둠 속에서 오히려 더 또렷하게 빛났고, 아르노 강 위로는 반짝이는 조명이 길게 이어졌다. 여기가 왜 피렌체 최고의 야경 명소로 꼽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 풍경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마음 맞는 사람들과 맥주 한 캔 들고 다시 와야겠다고. 그렇게 나는 피렌체에 또 와야 할 이유를 하나 남겨두었다. 작은 캔 하나가 이 도시의 노을과 얼마나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그건 다음에 확인해 보기로 했다.
사진 속 나는 피렌체의 밤을 배경으로 미소 짓고 있지만, 사실 그 순간엔 이 도시의 밤을 더 오래 붙잡아두고 싶었을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아름다워서,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게 아쉬웠다.
여행 시기가 마침 추석, 그리고 중국의 국경절과 겹쳐서 그런지, 피렌체에는 한국인과 중국인 관광객이 유독 많았다. 이 사진도 한 중국 관광객이 찍어준 것이다. 찍고 난 후의 짧은 대화.
"你是中国人吗?" (너 중국사람이니?)
"不是,是韩国人" (아니, 한국 사람)
"...?"
상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끝으로, 묘하게 뭔가 오해가 남은 채 사진은 완성되었다. 2유로짜리 장미와 함께..
(네, 피렌체의 장미 장수에게 ‘당한’ 바로 그 장미..)
언덕에서 내려온 뒤, 나는 피렌체 시내를 한참 걸었다. 피렌체는 그냥 단순하게 걷기만 해도 좋은 도시였다. 벽돌 하나, 창문 하나에서도 오래된 시간의 결이 느껴졌고, 어디를 향하든 르네상스의 공기가 옅게 배어 있었다. 그 거리 위를 신식 버스가 지나가고, 현대적인 옷차림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이상하게도 조화롭게 느껴졌다.
나는 여행지의 마트를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피렌체에서도 마트에 들러 기념품을 사고,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고르는지 구경했다.
유명하다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에도 들렀다. 향을 고르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살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다음 날 더몰 아울렛에 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그래도 오래된 약국 안을 채운 향기와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공간은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하나의 향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은 피렌체의 대표적인 전통 카페인 ‘질리(Gilli)’를 찾았다. 1733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중 하나. 여행 전부터 버킷리스트에 적어 두었던 곳이었다. 늘 유럽 왕실을 연상케 하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클래식한 디저트가 늘 사진 속에 등장했기 때문일까.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었던 그곳이었다.
아침 공기는 상쾌했고, 카페 앞 테라스 자리는 벌써부터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한 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를 펼쳤다. 우선 커피. 그리고… 티라미수, 에끌레어, 딸기 타르트. 한국 같았으면 혼자서 이 많은 디저트를 시키진 않았을 테지만, 이건 여행이니까. 그리고 언제 다시 이곳에 오게 될지 모르니까. 궁금한 건 다 먹어보자는 마음 하나로 과감하게 주문했다.
주문한 디저트들이 하나둘 테이블 위에 놓이자, 작은 식탁이 금세 화려한 디저트 정원처럼 변했다. 티라미수는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을 만큼 폭신했고, 진한 에스프레소와도 절묘하게 어울렸다. 딸기 타르트는 바삭한 타르트지에 상큼한 크림과 과일이 어우러져 입 안이 기분 좋아지는 맛. 에끌레어는 포장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배가 너무 불렀기 때문에.
그 에끌레어는 다음날, 포지타노의 숙소에서 혼자 밤에 꺼내 먹었다. 사실 기대는 하지 않고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속이 꽉 찬 크림과 부드러운 식감이 완벽했다. 이건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랑 바로 먹었어야 했는데. 후회는 짧고 맛은 길었다.
혼자서 세 가지 디저트를 테이블에 늘어놓고 천천히 커피를 마시던 그 아침, 카페 안으로 쏟아지던 햇살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쩌면 그날의 과식은, 아주 잘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음은 역 앞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더몰 아울렛으로 향했다. 원래 목적은 단순했다. 엄마에게 줄 선물 하나만 사고 돌아오자는 거였으니까. 그랬는데, 문제는 마음보다 손이 더 빨랐다는 점. 결국 엄마를 위한 가방과, 나 자신을 위한 생로랑 카바스백까지 들고 나오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진 속에 보이는 가방이 바로 그날 쇼핑의 결실이었다.
사실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이번엔 부모님께 꼭 뭔가 사드리자는 다짐을 했었다. 처음엔 취업 기념으로 생각했던 건데, 그 약속을 지키는 데 3년이 걸렸다. 그 시차가 좀 웃기기도 하고,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쇼핑 후 남겨둔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날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떠오른다. 하루 만에 2000유로 넘게 쓴, 이탈리아 여행 최대의 소비. 로마에서는 일부러 쇼핑을 참기까지 했으니, 이 날 얼마나 작정했는지 알 수 있다.
쇼핑백을 한가득 들고 아울렛을 나서던 순간, 이상하게도 후련함과 뿌듯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말하자면, ‘내가 날 위해 썼다’는 명분과,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데서 이 정도쯤은 괜찮잖아?’라는 합리화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달까.
하지만 행복한 소비의 끝에는 살짝의 아쉬움도 따라왔다. 바로 이 일정 때문에, 애초에 가고 싶어 했던 우피치 미술관에 가지 못했던 것. 그래서 피렌체를 다시 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지금까지 두 가지: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맥주 마시기, 그리고 우피치 미술관 관람.)
이탈리아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만 더 많았다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천천히 머물러볼 수 있었을 텐데. 마음 같아선 두 달 살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문제는 언제나 시간과 돈이다.
그래도 언젠가, 조금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기를— 그런 막연한 바람 하나쯤은, 여행의 끝에 남겨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로마와 피렌체에서의 일정이 끝났다. 피렌체까지 온 김에 친퀘테레나 밀라노, 베네치아처럼 북부의 다른 도시들도 들러봤으면 더 좋았겠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연휴 일주일. 욕심을 부리기엔 일정이 너무 짧았다. 가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이번 여행에서의 ‘윗동네 구경’은 피렌체까지만 보기로 했다.
더몰 아울렛에서 돌아온 오후, 맑은 햇살이 비치던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역 안은 여행을 끝내는 이들과 또 다른 시작을 기다리는 이들로 북적였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 쇼핑백을 캐리어에 겨우 끼워 넣고, 물 한 병으로 숨을 고른 뒤, 살레르노행 이딸로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제는 이탈리아 남부로 향한다. 바다 냄새가 나는 도시, 그리고 나를 조금 더 말랑하게 만들어줄 풍경들이 기다리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