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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사우 (束草四友)

<에세이문학> 2022년 여름호. 등단 작가 신작 발표

by 윤슬log


글방의 친근한 네 가지 벗을 일컬어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한다. 내가 사는 속초에도 소중한 벗들이 있는데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어 펜을 들었다.



첫 번째 친구는 바다. 속초는 우리나라 동쪽 끝에 있는 도시로 깊고 푸른 동해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특별히 나는 반짝이는 윤슬을 좋아하고, 바람이 많은 날 파도 구경하는 것을 즐겨한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바다로 나가 모든 상념을 내려놓고 ‘바다멍’, ‘물멍’에 빠져드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묘미다.

눈을 들면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변화무쌍한 파도를 선사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초연한 모습이기도 하다. 숱하게 제 몸을 쳐서 부서지는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거센 풍파에 흔들리더라도 큰 파도가 지난 후 금세 평온함을 되찾는 그를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는 사계절 다른 매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호젓한 봄의 바다는 연인과 산책하기 안성맞춤이고, 여름 바다는 가족들의 천진난만한 놀이터가 된다. 가을의 바다는 설악산과 더불어 단풍객들이 즐겨 찾는 장소로 알록달록한 등산복이 모래사장을 물들인다. 겨울 바다는 또 어떠한가. 바다 위로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쌓을 듯 쌓이지 않고, 바다 속으로 침잠하는 눈송이의 매력에 단박에 넋을 잃고 만다. 이처럼 바다는 속초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친구가 되어준다.


속초에서 만난 두 번째 벗은 산이다. 속초는 뒤로 설악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앞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져있다. 달마의 동그란 얼굴을 닮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달마봉’과 바다를 보며 트레킹 할 수 있는 ‘청대산 산림욕장’, 설악산에 자생하는 식물들을 가꿔놓은 ‘설악산 자생식물원’ 등이 설악의 정취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설악산이 빚어낸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나는 ‘울산바위’를 가장 좋아한다. 사실 속초에 이런 멋진 바위산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여행객으로 다녀갈 때는 미처 몰랐다. 미시령 옛길로 진입하는 도로에서 안개가 걷히고 마주한 울산바위의 전경이란! 얼마나 고고하고 장엄한지 홀로 우뚝 솟은 청아한 자태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특히 여름 깊은 시기까지는 녹음을 드리우다, 발그레한 새색시 얼굴로 물드는 가을의 울산바위는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비 온 후의 풍경도 압권인데, 마치 구름 이불을 휘감은 듯 운무(雲霧)로 속살거리는 울산바위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속초에 오면 가장 먼저 나와 반겨주고, 마지막까지 손 흔들어 배웅해주는 외설악의 울산바위. 때로는 도도하게 때로는 엄마처럼 따뜻한 너의 품에서 오래오래 함께 살아가고 싶다.


세 번째로 소개하는 나의 친우는 속초의 아름다운 호수다. 속초는 ‘영랑호’와 ‘청초호’ 라는 큰 호수를 품고 있다. 두 호수는 과거에 바다였던 곳으로 청초호가 세련된 느낌의 잘 정비된 호수공원이라면, 영랑호는 자연스러운 정취가 살아있는 멋이 가득한 곳이다. 나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호수 그 자체를 느끼고 싶어 영랑호를 자주 찾곤 한다. 봄이면 벚꽃터널, 꽃이 지는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철쭉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가을에는 호숫가에 심어둔 나무들이 단풍 길로 변해 계절의 변화를 담뿍 느낄 수 있다.


또한 영랑호에서는 흰뺨검둥오리, 물닭, 가마우지, 고니, 저어새 등 속초를 찾는 철새들도 흔히 볼 수 있다. 멸종위기종 삵이 호숫가로 내려와 물 마시는 모습을 본 일은 동물 애호가인 나에게 근사한 선물이 되었다.


무엇보다 영랑호는 인도, 차도, 자전거 도로가 잘 구분되어 있어 교통수단에 따라 각기 다른 매력으로 감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는 설악산을 옆으로는 영랑호를 두고 크게 한 바퀴 도는 것을 좋아한다. 힘이 들면 아무데나 자전거를 세워놓고 숨을 고르는데 공기도 좋거니와 무엇보다 풍경이 아름다워 자연스럽게 사진기에 손이 간다. 석호(潟湖) 특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영랑호가 점점 개발되고 있어 아쉽지만, 그래도 나는 처음 이곳에서 자전거를 타며 느낀 맑은 정취와 그보다 더 맑은 자연환경에 감동한 기억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벗은 서점이다. 속초는 인구 8만의 작은 도시지만, 일부러 멀리서도 찾아오게 만드는 독특한 매력의 독립서점들이 여러 곳 있다. 독서모임, 글쓰기 모임 외에도 각종 북토크와 저자 강연회 등이 활발해 서점여행이 가능한 곳이 바로 속초다. 출판사에 다니는 선배가 빈 캐리어를 끌고 내려와 동네 책방을 돌며 가방을 꽉 꽉 채워가는 것을 보고, ‘속초는 작지만 참 알찬 도시구나.’ 하며 뿌듯해했던 기억이 있다.


1956년에 문을 연 이래로 3대째 서점을 이어오고 있는 ‘동아서점’은 따뜻하고 친절한 서점이다. 주제에 맞게 잘 배열된 서가와 주인장이 손글씨로 쓴 책 소개 글을 읽는 것도 이곳을 찾는 재미 중 하나다. 동아서점과 길 하나 사이로 마주하고 있는 ‘문우당(文友堂)’ 서림은 책방 이름처럼 글과 사람이 벗이 되는 곳으로 대형서점의 대중성과 동네 책방의 개성을 모두 갖춘 곳이다. 2층에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모임이 열린다. 지금 옆에 있는 짝꿍을 만난 것도 문우당에서 모임을 가지던 독서모임이었고, 동아서점에서 열린 김훈 선생님의 강연에서 첫 데이트를 하였으니 속초의 서점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밖에도 책방과 카페, 게스트 하우스를 결합한 북스테이 형식의 ‘완벽한 날들’도 속초의 명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서울을 떠나 또 다른 삶의 터전으로 속초를 택한 것도 앞서 소개한 네 벗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휴식같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산과 바다를 감상하고, 호숫가를 거닐며 책과 함께 하는 시간들. 스치는 인연에서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벗들에게 오늘도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2022년 여름. 계간 <에세이문학>


◉ 나에게 문학이란?

나에게 문학이란 ‘파랑새’ 다. 희망과 행복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음을 문학을 하며 (글을 쓰며)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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