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동그라미
남편은 나를 '이나 새'라고 부른다. 결혼 전 애칭은 '모찌'였다. 둘 다 하얗고 동그랗다는 특징이 있다. 별명에 대한 무무의 주관은 굉장히 확고한 편이라, 내가 아무리
"내 얼굴 계란형이야. 이거 봐봐. 지금 살 빠져서 완전 역삼각형인데?"
입 안으로 볼을 한껏 당겨 물며 따져도 남편은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 다른 말이 없다.
모찌가 이나 새가 된 계기는 2년 전 겨울 삿포로 여행을 하면서부터다. 우리 둘 다 홋카이도의 대표 새인 흰 오목눈이 (시마에나가) 기념품에 반해버린 것이다. 남편은 세상 동그란 것이 아주 귀엽다며 흰 오목눈이 필통, 볼펜, 노트, 키링도 두 개나 사 왔다. 마그넷은 지금까지도 우리 집 현관문에 잘 붙어서 외출할 때마다
"잘 다녀와."
동그란 인사를 건넨다.
그 후로 내 별명은 이나 새가 되었다. 그리고 남편 무무는 이나 새의 둥지다.
공항 면세점에서 인형 하나하나를 비교해 좀 덜 찌그러진 것, 모양이 동그랗고 예쁜 것, 실밥이 안 풀린 것들을 검수해 꼼꼼히 골랐다. 하나는 머리에 삿포로 눈꽃을 장식한 흰 오목눈이를 다른 하나는 입에 붉은 열매를 물고 있는 새였다. 남편이 메고 다니는 백팩에 달아주겠다고 하자 무무는 쿨하게 좋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즘 가방에 인형 달고 다니는 게 유행이라 우리도 어렵지 않게 편승할 수 있었다.
남편은 오목눈이를 매달고 회사도 가고 학교도 간다. 현관을 나서는 남편의 모습 뒤로 하얗고 동그란 인형이 날갯짓을 한다. 재미난 장면을 보면서 나는 무무 어깨에 매달린 이나 새를 위해 매일 아침 남편이 집을 나서는 것 같아 찡하고 짠하다.
암 표준치료가 끝날 때마다 나는 다시 회사에 들어가려고 애썼다. 머리만 자라면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 아프고 직장 다니면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던 청춘이 그리워서였을까. 자주 아팠지만 재취업만 하면 당당하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금방 거듭날 거라고 생각했다.
2~3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재발로 경력 단절 기간이 계속 늘어갔고, 나이가 있는데 신입으로 원서를 넣으려고 하니 부족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전 직장에서 하던 회계일은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학 시절 취업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토익, 워드, 컴활 기타 자격증까지 열심히 땄다. 하필 코로나 때라 라텍스 장갑이랑 비닐장갑, 마스크까지 끼고 컴활시험 보던 내 모습. 지금 떠올려도 웃프다.
토익은 한 달 정도 공부하니 900을 넘겼다. 하지만 번번이 발목 잡는 건강에 원서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만료된 점수만 두 번째였다.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해서 뭐라도 해보려는 데 좀처럼 나아갈 수가 없었다. 현실보다 더 힘들었던 건 이런 생각 때문에 찾아온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하면 뭐 해. 어차피 안 될걸.'
우울한 순간들이 생겼다.
항암 치료를 하고 있을 때는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는데, 치료가 끝나면 기쁨이나 안도의 감정보다는 불안함, 조급함, 초조함이 컸다.
'내 인생 어디로?'
라는 막막함이었다. 당장 나가서 벌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자기 일이 있고 돈을 벌어야 사회인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강박이 늘 조바심이 되었다.
아침 밥상에서
"나 이제 뭐 해. 너무 막막해. ㅠㅠ"
하면서 엉엉 우는 내 모습이 나도 생경했으니 부모님은 오죽하셨을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꼭 뭐를 해야 하니? 몸도 그런데 그냥 쉬어. 마음 편하게 있어."
나도 안다. 내가 안 아픈 게 모두를 도와주는 거라는 걸. 가족들은 내가 야심 차게 뭘 해보겠다고 하면 근심 어린 표정이 된다. 전신 마취 여덟 번, 항암과 방사선 치료, 매일 복용해야 하는 호르몬제까지. 병력이 이렇게나 화려하니 당연히 모두의 걱정을 살 만했다.
회사 다니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공공기관 행정직으로 안락한 삶을 살았던 나는 갑자기 마카롱을 구워 팔거나, 스마트 스토어를 연다거나, 주식 투자 같은 일에 재능이 없었다.
'공부를 기똥차게 잘해서 전문직을 할걸. 아니면 차라리 일찌감치 기술을 배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열심히 살아서 어정쩡한 포지션이 된 게 아쉽기만 했다.
그렇게 부유(浮遊)하던 삼십 대 초반에 남편을 만났다. 무무는 도전하고, 좌절하고 또 치료하고 일어서는 나를 옆에서 묵묵히 지켜주었다.
청첩장을 돌리면서 내 사정을 다 아는 전 직장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배님, 이제 결혼도 했으니 다시 돈도 벌고, 뭐라도 해보고 싶은데... 사실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9 to 6 회사는 무리일 것 같고, 회사 말고 다른 걸 하자니 잘 모르겠고."
"뭘 해 하기는 자꾸. 그냥 있어. 그저 쉬는 팔자다 생각하고 편하게 쉬어. 그러다 보면 몸도 더 건강해지고 하고 싶은 것도 생길 거야. 일단 다시 안 아픈 게 제일 중요하잖아. 너무 부담 갖지 마."
엄마 아빠가 비슷한 말을 했을 때는 "젊은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느냐"며 반기를 들었었는데 (안 겪어봐서 모른다고), 회사 생활도 같이 하고 속사정을 다 아는 선배의 말에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일단 다시 안 아픈 게 관건이었다. 부모님 밑에서 혼자 아플 때랑 결혼하고 남편이 있는 데 아픈 것과는 느낌이 다르긴 했다.
다행히 결혼 후 찾은 '안정감'으로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했던 마음, 회사가 정답인 것 같았던 생각들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왕 이나 새로 살 거면 '꿀 빠는 이나 새'가 되면 좋으련만, 사실 나는 언젠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가계 경제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 '모찌 호강시켜 주는 게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남편을 보며 나도 남편이 하고 싶은 일, 현실과 타협해서 접어놓은 꿈들도 다 이룰 수 있도록 팍팍 밀어주고 싶다.
집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흰 오목눈이의 동실한 자태가 보인다. 털 찐 몸통 사이로 있는 듯 없는 듯 솟아있는 날개가 보인다. 지금은 무무 둥지에서 감사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다시 비상해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다.
이나 새는 오늘도 열심히 꿀을 빤다. 악착같이 잘 쉬고 잘 차려서 부지런히 모은 꿀을 우리 미래에 가득 담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