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사거리에서 꾼 꿈
부모님은 우리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모범생이라는 수식어도 거창하고, 동생과 나 둘 다 적당히 알아서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아버지는 우리 남매를 불러다 놓고 한 가지 강렬한 인사이트를 남기셨다.
"너네가 고등학교 3년만 나 죽었소~ 하고 공부하면, 앞으로 인생 30년이 편해진다. 3년만 참아. 딱 3년!"
그 후로도 나는 이 이야기를 꽤 자주 들었다.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온 날에도, 수능이 치러졌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방학 때 자율학습하러 집을 나설 때도 아버지는 등 뒤에서 "3년"을 외쳤다. 그냥 "공부하라"는 말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학창 시절을 보낸 중계동 은행사거리는 당시 '강북의 대치동'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상호가 다른 은행 건물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학원가가 기라성처럼 빛나고 있었다. 학림이나 토피아 같은 대형학원이 밀집해 있어 45인승 셔틀버스가 쉬지 않고 학생들을 실어 날랐다.
은행사거리의 밤은 웬만한 거리의 낯보다 활기가 넘쳤다. 자정이 넘어서도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상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새벽 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분식집이 문을 닫은 거리에는 포장마차들이 즐비했다. 메뉴는 주로 우동이나 잔치국수, 김밥과 떡볶이 같이 학생들이 야식으로 먹을만한 음식들이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항상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던 주황색 천막을 잊을 수가 없다. 구수한 어묵 국물 냄새가 피어오르던 연기 속에는 학원 수업을 듣다 나온 아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중학교 2학년. 우리 반에서 전교 1등을 하던 J가 그랬다. 친구는 은행사거리 독서실에서 매일 2시까지 공부를 한다고 했다.
"야. 우리가 고3도 아니고 매일 새벽 2시까지 공부한다고?"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전교 1등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J의 말에 따르면 학원 끝나고 새벽 2시까지 자습을 하는데, 중간에 배가 고플까 봐 매일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 온다는 거였다. 학원 앞에 차를 대고 간식을 먹고 다시 들어가서 남은 공부를 한다고 했다. 참고로 독서실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J의 집이었다.
김태희가 공부하려고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뛰어갔다더니 놀랄 노자가 여기도 있었다. 우리는 고작 열다섯이었다. 중계동의 교육열은 실로 대단했다.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니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요즘은 '4세 고시, 7세 고시, 초등 의대반' 같은 말들이 통용된다고 하니 우리나라 교육열은 특정 지역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유년시절을 보낸 은행사거리가 그리워 지금도 가끔 그곳에서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다. 아직 동네를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옛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익숙한 곳, 가보고 싶었던 곳이 좋아 종종 은행사거리에 들르는 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풍경이 있다면 가방 메고 학원가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낮에도, 저녁에도 그리고 주말에도 한 무리의 학생들이 우르르 횡단보도를 건너고, 우르르 학원 건물로 들어갔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창 밖을 바라보는 자리에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수 없이 많은 아이들이 거리를 스쳐갔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생,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핸드폰만 보며 지나가는 친구, 삼삼오오 모여 비속어를 내뱉으며 낄낄대는 개구쟁이들도... 모두 어느 날의 나와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학원만큼 많은 간식집에 늘어선 아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잠깐 쉬는 시간에 요기하려는 학생들이 와플과 탕후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독서실 간판들은 '스터디 카페'로 바뀐 지 오래였다.
"나도 저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감상이 튀어나왔다.
"나도 저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대학 들어가자마자 암환자가 됐네."
친구가 큭큭 거리며 말했다.
"가서 말하고 와. 애들한테 가서 말해줘 버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끼리 웃던 웃음은 이내 실소가 되었다.
아빠는 항상 3년만 나 죽었소 하고 공부하면 내 인생 30년이 보장될 거라고 했다. 혹시 그 '죽었소~'가 문제였을까? 별 우스운 생각이 다 들었다.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세상천지 다 똑같을 것이다.
대학 생활을 1년 누리고 나는 암환자가 되었다. 유전력도 없고 술담배, 입시스트레스도 없었다. (술은 대학 새내기 때 다들 마시는 정도만^^) 가고 싶었던 대학에 일찌감치 합격해 2학기 때는 등교도 하지 않고 놀기 바빴다.
원인 찾기에 골몰했던 것도 잠시, 나는 세상엔 답이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을 멈추었다. 그 대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나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꾸려가야 할 지에 더 집중한다.
몇 해 전 남편과 함께 은행사거리를 찾았다.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그런 고향은 아니어도 내가 자란 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익숙한 학원 건물 근처에 주차를 하고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예전에 다녔던 학원들은 다 사라졌지만 또 다른 이름의 학원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건물 외벽에 이렇게나 많은 간판을 걸 수 있다니 은행사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참 신기한 곳이다. 언제나 학생들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오는 곳, 밤에 혼자 다녀도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곳 그리고 꿈 많았던 나의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 학창 시절을 다 보내고 파릇파릇한 새내기가 되기까지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그때 꾸었던 꿈 중에 암환자는 없었지만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모를 일이라고.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 사이로 남편을 향해 말했다.
"여보, 여기가 내가 나온 초등학교고, 저쪽으로 가면 OO중학교가 있어. 그리고 이 건물 7층에 영어학원이 있었는데......"
은행사거리를 떠올리면 언제나 애틋하다. 그곳에는 '대학만 가면 다 된다'는 어른들의 말도 진심으로 믿었던 순수한 내가 있다. '꿈'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가며 인생 최고로 열심히 살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리던 삶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나는 이렇게 잘 살아있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을 한 번씩 되뇌고 가열차게 점심을 차려본다.
웃픈 인생도 파이팅이다!
* 메인 사진 출처는 2018.3.30 스카일데일리 뉴스 <프랜차이즈 시장, 경쟁 심화되고 영업기간 줄어>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