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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하 Jan 15. 2020

우리의 투쟁은 말을 잠깐 멈추는 것이다(1)

영화 <생일> 비평

끝없는 슬픔 안에서 우리가 된다.


진리는 낯설고 두려운 존재이며, 끝내 완전히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언제나 ‘타자(他者)’다. 만약 진리가 내 안에 포획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온전히 언어로 설명할 수도 내 안에 가둬둘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라는 이름의 타자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 오직 그 끝없는 과정 자체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참사라는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세월호 사건은 그 사건의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모든 행위 자체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타자화해 온 진리로의 거리두기 혹은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를 한꺼번에 소환해내는 일거의 사건임에 틀림없다. 


‘세월호’라는 참사와, 이후 이를 훨씬 더 거대한 참사로 만든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모두에게 거대한 상실과 슬픔을 가져왔다. 우리가 상실한 것은 304명의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잃은 또 다른 것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정의와 가치였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정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가 얼마나 낡았는지를 폭로했다. 그리고 참사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월호의 슬픔은 끝나지 않았다. 적당히 하라고 소리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유가족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은 세월호 곁에서 여전히 슬퍼하고 있다. 이 글은 세월호의 슬픔이 왜 끝날 수 없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세월호의 슬픔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세월호 참사로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경쟁사회’라는 동일성의 폭력에 빠져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의’ 혹은 ‘가치’라는 이름의 타자를 상실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타자를 상실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주체인 ‘나’를 잃어버렸다는 것 역시 드러났다. 주체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대립항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자의 상실에 대해 유가족들은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투쟁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언어는 지나치게 낡고 협소해서,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슬픔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철학자 백상현은 유가족들이 슬픔을 멈출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그것은 세계의 균열이었던 그 상실을 봉합할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슬픔과 애도를 구분하는데 그에 따르면 애도는 슬픔을 설명하고, 이를 통해 슬픔을 종결하는 행위이다. 애도를 위해서는 먼저 권위 있는 언어를 통해 슬픔을 설명함으로써 이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언어와 그것의 권위에 불신을 품게 되었고, 낡은 언어로 슬픔을 설명하고 봉합하려는 시도를 거부한 채 끝없이 슬퍼함으로 저항했다.


슬픔은 단순히 상실에서 비롯된 무기력한 감정이 아니다. 슬픔에는 힘이 있다. 슬픔의 강력한 힘 중 하나는 비슷한 슬픔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슬픔을 지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와 내가 ‘우리’가 될 수는 없다. 영화 <생일>에서 순남과 정일은 수호의 상실로부터 비슷한 슬픔을 경험했지만 ‘우리’가 될 수는 없었다. 이는 우선 순남이 수호를 상실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을 때 정일이 순남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일은 순남과 똑같이 수호를 상실했지만, 이 상실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순남의 삶 속에서 얼마나 저열하고 잔인하게 다뤄졌는지 알지 못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권력은 자신의 낡은 언어로 이해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세월호의 슬픔이 권력의 토대를 뒤흔들 만큼 전복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권력 스스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보의 완전한 통제나 은폐가 불가능해지자 모든 것을 자신의 편협한 언어로 치환하기 시작했다. ‘보상금’, ‘색깔론’, ‘경제적 손실’ 등 권력의 낡은 언어는 홍수처럼 범람하며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정의를 찾기 위한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묻어버렸다. 그리고 낡은 언어의 홍수에 많은 이들은 지겨움과 피로감을 느끼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외면하고 망각해갔다. 그러나 정일은 세월호의 상실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저열함과 잔인함을 알지 못했다. 보상금을 어떻게 했냐고 묻는 정일의 천진한 물음에서는 정일의 무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순남과 정일의 상실은 같지만, 둘의 슬픔은 다른 모습이다. 


순남이 다른 이들과 슬픔 안에서 ‘우리’가 될 수 없는 더 큰 이유는 수호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순남은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슬픔을 지닌 타자 역시 인식하지 못한다. 같은 이유로 순남은 다른 유가족들과도 ‘우리’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순남은 유가족들의 투쟁을 애써 모른 체하고, 죽은 자식들 사진 앞에서 애써 웃어 보이는 유가족들에게 날 선 말을 던진다. “소풍 오셨어요?”


수호의 생일은 수호의 생(生)을 기념하는 자리이자 역설적으로 동시에 사(死)를 인정하는 자리이다. 순남이 수호의 생일을 챙겨 주고자 하는 이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역시 상실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순남의 슬픔은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자기 반복적인 슬픔이다. 순남은 수호의 생일파티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상실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그는 자기 반복적 슬픔에서 빠져나와 함께 아파하고 있는 타자를 인식한다. 그리고 정일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순남과 함께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순남의 슬픔을 온전히 알지 못했던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한다. 순남은 수호에 대한 미안함으로 절규하는 정일의 어깨에 손을 올려 위로하고, 수호를 기억해 주는 이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다. 이렇게 서로의 아픔과 슬픔에 참여할 때, 남겨진 이들은 비로소 끝없는 슬픔 안에서 ‘우리’가 된다.


* 참고 자료

백상현,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위고, 2017, 27쪽.

위의 책, 25쪽.

위의 책. 21쪽,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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