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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하 Jul 08. 2020

트랜스젠더에게는 자리가 없다

  올해 1월 22일 국군은 트랜스젠더 군인인 변희수 하사의 전역을 결정했다. 그는 성별 정정 수술을 받고 여군으로 복무하기를 희망했지만 군은 그가 스스로 심신장애를 유발했다고 보았다. 2월 7일에는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학생이 입학을 포기했다. 반대 여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소위 말해 남성의 자리라고 여겨지는 군에서도, 여성을 위한 자리인 여대에서도 트랜스젠더 여성은 배제됐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남성’의 자리에도 ‘여성’의 자리에도 설 수 없었다.


   젠더 이분법적인 한국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 그 어디에도 트랜스젠더 여성의 자리가 없다는 것은 트랜스젠더 여성이 온전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 장소, 환대」의 저자 김현경에 따르면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 도서관이나 학교, 극장 같은 공공장소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었던 흑인들, 밤 8시부터 이튿날 아침 6시까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으며 일체의 오락 시설이나 스포츠 시설도 이용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 이러한 예는 사회적 성원이 장소에 대한 권리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예로는 노예를 생각해 보자. 노예는 물리적으로 사회 안에 있더라도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사회 바깥에 있다. 노예는 고프먼이 분석한 ‘상호작용 의례’의 핵심, 즉 ‘상대방이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제외된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체면도, 의무도, 권리도 없다. 상대방 역시 그의 체면과 의무와 권리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노예는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 동등한 사람으로서 현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사회 바깥에 있는 존재, 사회에 자리를 부여받지 못한 존재다. 올해 벌어진 두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 역시 자리를 부여받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 등 고정된 성 정체성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주장은 차치하고, 일부 페미니즘 진영에서조차 트랜스젠더 여성의 자리를 부정하는 것은 왜인가. 첫 번째 근거는 트랜스젠더 여성이 ‘진짜 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생물학적 여성이 겪어온 삶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집단 안에서도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삶의 경험은 천차만별이다. 또한 수많은 여성들이 공유하는 ‘여성의 삶’은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을 이유로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삶의 경험에서 온다. 따라서 트랜스젠더 여성 역시 ‘여성의 삶’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차이를 토대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싸워왔다. 페미니즘은 사회적 구성물을 자연의 법칙인 양 호도하고 여성을 ‘걸어 다니는 자궁’ 취급하는 주장과 끈질기게 맞서 싸워왔다. 그런데 여성을 자궁과 질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다시 돌아가자는 주장과 같다.


끝없이 여성임을 증명해야 하는 여성

   두 번째는 트랜스젠더 여성이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해서 다른 여성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주장이다. 코르셋은 트랜스젠더 여성이 성원권을 인정받기 위한 전략으로 기능했다. 주류 사회에서 소수자로 낙인찍히지 않고, 시스젠더 여성으로 ‘패싱’ 당하기 위해서는 사회 규범에 걸맞은 ‘여성’으로 보일 필요가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성별 정정 과정에서도 자신이 전형적인 ‘여성’임을 증명해야 한다.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조사에 따르면 성별 정정과정에서 가장 많이 요구받은 제출서류는 사진으로, 이는 성별 고정관념에 맞는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특정한 성별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이라는 요구다. 또한 트랜스젠더를 부정하고 젠더 이분법을 강화하는 것은 오히려 트랜스젠더가 성별 고정관념에 자신을 끼워 맞추도록 만든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낙인이 강화되면 트랜스젠더로서의 정체성을 숨기게 되고, 이를 위해서는 전형적인 ‘여성’ 혹은 ‘남성’으로 보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여성을 일반화 할 수 없듯이 모든 트랜스젠더 여성을 일반화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소수자 집단을 납작하게 규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폭력의 방식이다. 페미니즘 역시 여성을 납작하게 규정하려는 시도(예컨대 ‘여성은 감정적이기 때문에 이성을 요구하는 일에 어울리지 않다.’ 따위의 주장)에 맞서왔다.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내부에는 규범화된 트랜스젠더 이미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상당수 존재한다. 이러한 목소리를 무시한 채 트랜스젠더 여성을 ‘코르셋을 조장하는 집단’으로만 일반화 하는 것은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다.


여성의 자리를 찾아서

   트랜스젠더 여성의 자리를 찾는 일은 다른 여성의 자리를 빼앗는 일이 아니다. 이는 사회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여성에게 자리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시도에 맞서 여성의 자리를 찾는 과정이다. 이는 페미니즘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이자 앞으로도 해 나가야 할 일이다. 


참고 문헌

1)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p.64.

2) 같은 책, p.68.

3) 같은 책, pp36~40 참고.

4)  시스젠더, 타고난 생물학적 성과 젠더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시사상식사전, “시스젠더”, NAVER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15806&cid=43667&categoryId=43667)

5)  어떤 사람의 외적 모습이 사회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성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위키백과, “패싱(젠더)”,https://ko.wikipedia.org/wiki/패싱_(젠더))

6)  사진은 대법원 예규에서 요구하는 서류가 아니며, 사진이 없어도 신청인을 직접 대면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제2회 공익인권분야 연구결과 발표회 자료집,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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