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일째. 자전거는 신의 한 수!
오키나와 여행 2일 째다. 왜 '시작하며' 글 다음에 첫날 여행기가 없냐 물으신다면 그것은 첫날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숙소를 찾느라 진을 다 빼서 숙소에서 바로 뻗었기 때문이다. 구글을 너무 믿었다. 역시 남자와 구글은 적당히 믿어야 한다. 숙소 근처 학교만 빙글빙글 돌다가 그 학교 학생들이 배낭을 맨 이상한 사람이 학교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고 신고라도 할까 겁이 날 정도였다. 고생을 한 덕분인지 숙면을 취하고, 다음날 상쾌한 컨디션으로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숙소에는 오키나와 바닷바람을 한껏 머금어 녹은 슬었지만, 생생 잘만 나가는 자전거가 무료 임대되었다. 나하시는 생각보다 커서 자전거를 빌렸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걷기엔 조금 먼 거리를 자전거로 맘껏 누빌 수 있었으니까.
제일 먼저 숙소를 나서서 한 일은 다음 날 가야 하는 도카시키지마(지마, 시마로 끝나는 지명은 보통 섬이다)행 표를 도마린 항에 가서 끊은 것이다. 여기서 잠깐! 오키나와 여행은 현금을 되도록 많이 준비해야 한다. 일본 여행이 처음은 아니어서 카드 사용이 한국만큼 원활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현금이 별로 없어서 카드를 쓸 요량으로 현금을 최소한으로 준비해간 난 제대로 신고식을 치렀다. 대부분의 숙소 (게스트하우스)는 현금으로 숙박비를 받았으며, 웬만한 식당도 카드 결제가 불가했다. 물론 도마린 항구에서 끊은 배 편의 삯도 카드결제 불가. 그렇다면 현지에서 출금을 하면 되지 않냐고. 아니다. 웬만한 은행에서는 해외 카드로 출금이 불가능했다. 오! 겨우겨우 찾아낸 ATM기에서도 VISA 카드는 사용이 안됐으며, 비상용으로 들고 있었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로 겨우 현금서비스를 받았다(그 통장엔 돈이 없었다). 현금서비스라니 왠지 신용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행 내내 불안감으로 떨어서는 안되므로 눈물을 머금고 현금 서비스. 오키나와 두고 보자. 내가 이렇게 고생한 만큼 더 즐겨주겠다. 알고 보니 나 말고도 오키나와에서 카드 사용이 잘 안돼 고생했다는 사람들의 후기가 많아서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표를 해결하고 나니, 숙제를 끝낸 것처럼 후련했다. 그러자 배가 고파왔다. 자전거를 달려 항구 근처로 갔다. 식당이 전혀 없어 보이는 곳에 대형 창고로 위장한 식당이 있었다. 가이드 북이 없었던 나는 이 곳이 유명한 곳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현지인이 가족단위로 줄을 서 있는 걸 봐선 먹을만한 음식을 파는 곳이 분명했다. 자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긴 줄을 뚫고 당당하게 바 자리에 자리를 잡고 고기 소바를 시켰다. 나는 분명히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며 '미트 소바'를 달라고 주문했지만, 찰떡같이 '니꾸 소바'로 알아들으신 아주머니께서 볶은 고기국수를 내주셨다. 홍길동전에 나온 율도국이 옛 오키나와의 류쿠 제국이란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던가. 산더미 같은 고기국수를 보니 오키나와 사람들은 고봉이 뭔지 아는 사람들이 분명했다. 이 산더미 국수는 750엔이었지만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다. 내 왼쪽 옆에 앉은 할아버지를 따라 남은 국수를 포장해서 저녁식사로도 먹었다. 맛은 어떠냐고 물으신다면, 음 가성비는 높으나 국수가 툭툭 끊어져 국수 자체가 맛있지는 않았다. 오키나와의 국수는 소면보다는 칼국수에 가까워 두께는 두껍지만 쫄깃쫄깃하지 않고 다소 퍽퍽한 식감으로 나중에 나고시에서 먹었던 국수를 제외하곤 입맛에는 안 맞았다. 하지만 입맛은 사람마다 달라서, 내 오른쪽 옆에 앉았던 고독한 미식가는 혼잣말로 계속 '맛있다'를 연발했다고 한다.
밥을 먹었으니 밥값을 해야지. 다른 여행자의 밥값은 무엇일까. 나는 일단 그 지역의 시장과 서점을 돌아보는 것을 최고의 밥값으로 친다. 우다 토모코의 <오키나와에서 헌책방을 열었습니다>라는 나온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책을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이 책은 오키나와에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서점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는 '울랄라'를 실제로 운영하고 있는 서점 주인의 에세이이다. 저자는 도쿄의 준쿠도 서점에서 일을 하다 오키나와로 발령이 나 오키나와에서 지내다 아예 이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느낌상 '아예'는 아니고 '일단' 정착이 맞겠다) 이방인에서 지역민으로 거듭나며 느끼는 감정들과 일련의 사건들로 오키나와에 대해 막연하게 나마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다. 책 소개는 이쯤 하고, 이 책에는 그런 소중한 내용뿐만 아니라 무려 나하시의 서점 지도가 있었는데 다른 가이드북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서점의 정보가 너무 반가워 그 페이지만 150% 확대 복사를 해 덜렁덜렁 오키나와까지 들고 왔다고 한다.
현자의 서점인 울랄라부터 가봐야 되는데, 책을 읽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어쩐지 괜히 저자에게 실례가 될까 막 들이닥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서점은 시장 안에 있는데 말이다! 서점과 시장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지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서점 지도를 따라 다른 서점을 돌아보기로 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준쿠도도 츠타야도 일본의 다른 지점보다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몇 군데 돌고 진이 빠진 나는 기운을 내려 나의 사랑 유니클로에도 들렀지만, 웬걸! 오키나와는 유니클로 역시 어쩐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본사가 본토에 있는 일본 브랜드들은 오키나와랑은 잘 맞지 않나 보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밥값을 하려면 오키나와에선 오키나와만의 어딘가를 찾아가야겠지. 오늘은 시행착오가 꽤 많았다.
남은 시간 국제거리를 둘러보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슈리성은 시내보다 조금 외곽에 있어서 모노레일을 타고 가야 했다. 관광명소인 슈리성은 오키나와에 온 관광객이라면 필수로 들르는 코스. 하지만 내게 슈리성은 사실 핑계였고, 그 근처 오래된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에 겸사겸사 슈리성도 지나가 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 양조장은 즈이센 주조로 오키나와의 전통주인 아와모리를 만드는 곳이다. 아와모리는 안남미로 만드는 증류주로 양조장에 근처에만 가도 솔솔 나는 술냄새가 달큰했다. 독에 익어가는 술을 볼 수 있을 거란 헛된 생각은 현대식 공장 앞에서 무너져 내렸지만, 시식한 술만은 제대로였다. 술맛도 잘 모르면서 한잔 두 잔 마시다가 술을 두병이나 사 오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 야, 너 배낭 가지고 왔잖아. 그거 다 메고 다녀야 해. 취한 자는 말이 없다.
어영부영 무거운 몸과 무거운 짐 (술 2병)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모노레일 역에 세워두었던 자전거는 훌륭한 카트가 되어주었다. 여러모로 고마운 자전거. 내일은 아침 일찍 섬으로 떠나야 한다. 섬 안의 섬은 또 어떻게 다를까. 뱃멀미는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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