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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등젬 Feb 19. 2024

강직성 척추염 증상들과 설레었던 첫 만남

당신은 강직성 척추염 환자입니다.

대한민국을 강타한 모든 드라마에선 건들기만 해도 픽 쓰러질 것 같은 여리여리한, 극단적으론 시한부이기까지 한 여자 주인공들이 많았다. 어릴 땐 그 모습이 왜 동경의 대상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엔 나도 저렇게 아파보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이 있었다. 당시 같이 어울리던 여자친구들 중엔 급식을 받자마자 그대로 퇴식구로 직진해서 밥을 다 버리고 쫄쫄 굶는 다이어트를 하던 친구들이 있어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한창 자랄 청소기에 밥을 그리 안 먹으니, 당연히 친구들은 점점 말라갔고, 드라마에 나오는 여리여리한 여성들이 되어갔다. 참 다시 생각해도 대한민국 미디어에 비치는 여성의 이미지는 유해하다. 


십 대 후반이 되며 자아가 성숙해지고 세상을 조금 더 알아갈 때쯤, 난 내가 그리던 난치병환자가 되었다. 정식으로 병명을 진단받은 건 그러부터 거의 십 년 후였지만 나의 첫 증상이 나타난 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겪은 죽음의 무게는 무거웠다. 검은 옷을 입고 끊임없이 오고 가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언제 잠을 자고 밥을 먹어야 할머니를 애도하는 손녀의 모습으로 보일지 고민하는 것도, 많은 것들이 처음이고 스트레스였다. 장례식의 마지막날 왼쪽눈이 빨개지고 아프기 시작했다. 결막염쯤으로 생각하기엔 통증이 상당했지만 부모님 두 분 다 정신이 너무 없어 보여 자체적으로 '결막염'으로 진단을 내리고 가족들과 수건을 같이 쓰지 않는 조치만 취했다. 아뿔싸. 이틀 날부턴 빛을 보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햇빛은 고사하고, 리모컨에서 나오는 빨간 불빛조차 눈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줄줄 났다. 그제야 엄마아빠는 (그리고 나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하필 구정 휴가기간이어서 근처에 문을 연 병원이 없었다. 진통제를 먹고 모든 빛을 차단한 방에서 하루종일 잠만 자다 그다음 날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다.


포도막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다. 눈에... 포도? 뭔 소리지. 안구 중간에는 포도껍질처럼 생긴 막이였고, 거기에 생긴 염증을 포도막염이라 부른다는 설명을 덧붙여주신 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정말 의느님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병명을 찾았으니 치료만 하면 되겠구나! 의사 선생님께선 염증 진행이 꽤나 심각해 스테로이드를 처방해야 한다 하셨다. 더 진행이 되면 실명에 이를 수 있는 병이어서 빠른 치료가 필요하다 하셨다. 처음으로 병원 대기실에서 도망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눈알주사도 트라우마의 형태로 기억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포도막염을 극복하고 (시력이 엄청나게 말도 안 되게 뚝 떨어졌다), 몇 년 후 겨울에 또 다른 증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끔찍한 천장관절 통증. 끔찍하다는 말로밖엔 형용이 안 되는 통증. 그 전날 난생처음으로 빙판길에서 하이힐을 신었던 터라, 10대가 힐을 신은 단죄라 생각했다. 발을 내딛을 수도, 걸을 수도 없는 강렬한 통증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몇 날 며칠을 누워서 지냈다. 그때 그 통증은 어떻게 낫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놀랬는지 감정만이 남았다.


나중에 강직성척추염이라는 정식 병명을 받은 날, 진단을 내려주신 의사 선생님께선 나의 살아온 과정 자체가 전형적인 강직성척추염 환자의 증상들이라 했다. 왜 십 년 동안 그렇게 많은 병원들이 나에게 오진을 했는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질문을 하니, 병 자체가 흔하지 않아 쉽게 찾아내는 병은 아니라고 했다. 물론 그것만으론 나를 거쳐간 모든 의사 선생님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었다. 통증은 끔찍했고, 내 삶을 다른 형태로 빚어냈다. 내가 강직성척추염 환자 카페에서 많은 위로를 받은 것처럼 나의 투병기를 통해 어디선가 내 글을 읽고 있을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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