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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min Yun Feb 13. 2018

영화 '코코(Coco, 2017)'

삶과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을 유일한 것, 사랑



얼마 전 영화 코코를 보고 왔다. 그들이 살아있는 우리를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안내하는 방식은 이전 작품에서처럼 아름다웠다. 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알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공존했다. 애초에 나는 죽음에 대해, 무언가를 상실한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다. 내 주변의 살아가는 것들을 신경 쓰며 살기에도 충분히 바쁜 삶을 살고 있으니까. 어느 날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무언가가 존재하고 그것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닐까 하는. 살아있는 동안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과 서로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겐 삶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커다래서 죽음을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해 아예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멀게는 뉴스와 영화 같은 매체들을 통해, 가깝게는 지인과 가족들의 소식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는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를 무섭게 하기에 당연하다. 희로애락과 함께 삶의 무게를 나누며 살아가던 무언가의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전투력을 상실하게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이란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이 가득한 곳이다. 그 속에서 살아있는 것들은 죽어있던 것들에게 계속해 생명력을 불어넣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 살아있던 것은 소명을 다한다. 모두의 일상이란 그 과정의 반복이다. 소유와 상실, 움직임과 정지상, 삶과 죽음. 어찌 보면 참 애석한 사실이다. 살면서 몇 번씩이나 그러한 반복을 지켜봐야만 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미구엘이 죽은 헥터를 만날 수 있던 이유는 결국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영화 코코를 보고 나서 행복하게 극장을 나설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삶과 죽음의 굴레가 '영원성'을 가지고 다른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가 끊어지지 않고 '영원성'을 띌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소유와 상실이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살면서 우리는 그 굴레를 벗어나지 않을 유일한 것, '사랑'을 경험한다. 사랑하던 것을 죽어서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던 이가 사라져도 여전히 그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 그것이 영화 코코가 건네는 상실에 대한 작은 위로였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쌓아나간다. 사람을, 지식을, 명예를 그리고 글로 정의되지 못할 무수한 것들을 축적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쌓인 것들은 우리 안에서 관계의 고리를 만들어 하나의 존재를 이룬다. 물론 죽음 앞에서 축적의 행위는 그 소명을 다할 테지만, 그것의 결과로 만들어진 존재의 의미들은 '영원성'을 가질 것이다. 때문에 대상이 사라지더라도 그것이 내게 가졌던 의미를 되짚어보며 대상을 추억할 수 있는 것이고, 어쩌면 어디에선가 그 대상도 살아있는 나의 의미를 되짚어보며 함께 그리워할 수 도 있는 것이다. 상실은 살아남은 이가 존재하던 세상에서의 상실이었을 뿐, 다른 세상에서 그 모습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영화가 보여준 것처럼 그저 서로를 열심히 그리워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 대상이 이 세상에 있건 없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은 무한한 삶과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을 유일한 것일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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