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엄마 이야기

비와 엄마

by 윤향기

엄마 하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어느 저녁, 퇴근 후 엄마와 장 보러 나갈 일이 있었는데, 준비하는 도중 엄마와 다투게 되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내가 낮동안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이라, 더 예민하게 굴었으리라. 다투면서도 같이 마트에 나가는 일정은 그대로 진행이 되었다.


차가운 공기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주차장 끝에 모르는 아저씨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난 축축한 비를 헤치고, 퀴퀴한 담배 연기 사이를 지나 냉큼 운전석에 앉아 문을 탁 닫아버렸고, 곧이어 뒷좌석에서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멀미가 심하시다. 그런데도 앞 좌석에 안 앉으신다고? 단단히 마음 상하셨구먼. 그렇다고 내가 먼저 풀진 않을 거다. 엄마 보란 듯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출발.


대화는 없었다.
'절대로 내가 먼저 말 안 할 거야.'
주차장을 빠져나와 대로로 들어섰다. 그렇게 절반 정도의 거리를 지나자,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드라이브하면서 기분 전환이 좀 되어서였을까? 이제 엄마한테 말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우리 오늘 뭐뭐 사야 된다 했지?"
대답이 없다. 아직 화가 안 풀리셨나?
"뭐 사야 되는데?"
그래도 대답이 없다.
'…. 뭐지?'
왠지 싸한 기분이 들어 뒷좌석을 흘깃 쳐보니, 아뿔싸- 엄마가 없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엄마가 왜 없지? 아까 분명 뒷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는데….'


집으로 돌아가려고 유턴 차선에서 정차하고 뒷좌석을 보는데, 바닥에 젖은 우산이 덩그러니 있다.
'…!'
큰일 났다.
'내가 엄마를 놔두고 왔구나. 설마… 엄마가 차에 제대로 타기 직전에 내가 출발해서 엄마가 사고 난 건 아니겠지? 그런데도 눈치도 못 채고, 여기까지 달려온 건 아닐까? 출발하기 전에 엄마를 확인해야 했는데…. 제발… 엄마한테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데."
후회와 각종 무서운 상상들이 머릿속에 스쳐 마음이 조여왔다.


'주차장엔 엄마가 없네.'

서둘러 차를 주차하고 쏜살같이 4층 계단을 뛰어올라 집에 도착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엄마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덤덤히 집안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 왜 여기 있는데? 아까 차에 안 탔나? 아까 분명 차 타는 소리 들었는데 왜 여기 있는데?"

흥분한 나는 엄마한테 또 언성을 높였다.

"우산 뒷자리에 싣고 앞에 탈라카니까 니가 그냥 가대."

"아니, 그럼 전화를 하지."

"……. 따라오지 말라는 말인 줄 알았다."

딸내미의 신경 거슬릴까 봐 무덤덤한 척, 하지만 풀이 죽은 엄마의 표정을 보자, 좀 전의 상황이 어땠을지 비디오 빨리 감기처럼 그려졌다.


엄마가 우산을 접어 뒷좌석에 싣고, 앞 좌석 문에 손을 내밀려는 찰나, 바로 코 앞에서 무정하게 떠나버리는 딸내미의 자동차. 이를 바라보는 당황한 엄마의 표정. 추적추적 내리는 비. 담배 피우던 아저씨들….


그렇게 멈춰진 시간 속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까 담배 피우던 아저씨들은 엄마의 그 모습을 봤을까? 엄마는 어떤 표정으로 다시 그 아저씨들을 지나쳐 집으로 들어왔을까?


엄마를 향한 죄책감이 '쿵' 내 가슴에 내려앉았다.


"엄마…. 그게 아니고 나는 엄마가 탄 줄 알고 출발한 건데…. 엄마 놔두고는 안 가지, 내가. 미안해요."
"그래. 엄마 장 보러 안 가도 된다."
"엄마, 아니다. 내가 진짜 잘못했어. 내 실수야. 우리 같이 장 보러 가자."


이제 나는 엄마에게 애원했고,

엄마는 마치 우리가 처음 장 보러 가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내 옆좌석에 앉아주셨다.


엄마는 이 일을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지만, 내겐 이날의 일이 마음에 새긴 문신처럼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무리 엄마한테 서운하거나 원망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날만 떠올리면…,

오히려 죄인은 내 쪽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