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의 글빵연구소 '환승' 관련 숙제입니다 (8강)
귀퉁이로 발을 들이민다는 게 그만 거실 한가운데로 나동그라졌다.
"이크, 깜짝이야.”
한 치의 오차도 없던 나의 매서운 눈은 어디로 사라졌나. 정교함을 부르짖던 내가 실수를 저지르다니.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나이를 들먹이며 핑곗거리를 찾는 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사방이 어둑어둑해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촉각을 곤두세우며 얼른 방향 감각을 되찾으려는 찰나, 반짝하고 불이 켜졌다. 내 몸뚱이가 반사적으로 바짝 오그라들었다.
'하필이면 저녁 준비할 때 들어오다니.'
정신을 차리고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세상에, 여기는 우리 가족이 들어와서는 절대로 안 되는 출입금지 구역이 아닌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왕 발을 들여놨으니 슬금슬금 집 구경이나 하면서 한강 야경을 즐기는 수밖에.
‘저 좀 지나갈게요.’
살짝 양해를 구하듯 조심스럽게 발짝을 뗐다. 이때부터 소동이 벌어졌다. 나를 정면에서 맞닥뜨린 안주인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으악!”
귀청이 찢어질 듯 큰소리였다. 귀신을 보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거참, 호들갑 한번 요란스럽네.’
벌집을 쑤셔대듯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은 비명에 안방에 있던 아저씨가 빠꼼이 얼굴을 내밀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방안이 살짝 엿보였다. TV 속,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의 심각한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사상 최저점인 0.6으로 떨어졌습니다. 인구 감소가 현실로 다가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실정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인구 감소’라는 낱말이 내 귓가에 붙어서 윙윙거렸다.
“어머머, 어떡해, 어떡해.”
안주인은 연신 방정을 떨며 소리를 질러댔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밖으로 나온 아저씨가 우뚝 선 채로 나를 노려봤다. 잔뜩 겁을 먹은 군인 아저씨 표정 같았다. 나는 헛웃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그리도 무서운 존재인가. 그때였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아저씨가 갑자기 총을 뽑듯 호기롭게 티슈 한 장을 뽑아 들었다.
'이크, 저것으로 내 숨통을 조여온다면 어떡하지?'
만만하게 여유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 목숨을 건지려면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동자가 내 몸에 꽂혔으니 가느다란 다리 하나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저 운명이라 여기며 하늘의 뜻에 맡기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내 몸뚱이 위에 하얀 티슈 조각이 덮인다면 숨은 끊어지고 말겠지. 창밖으로 툭 던져지는 순간, 이승과는 영원한 이별이다. 오랜 세월, 주워들은 경험으로 보아 우리네 삶의 순환이 그럴진대 세상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난 이래 줄곧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살아왔다. 그동안 특별한 육체노동도 없이 무던하게 잘 살아온 걸 감사한다. 비록 인간이 만들어낸 삶의 찌꺼기에 의존해 의식주를 해결해 왔다지만 그건 우리 종족의 숙명 아닌가. 모진 비난 속에 손가락질을 당해온 세월이 억울하기도 하다.
우리는 지구 역사상 최고의 번식률을 자랑해 온 가문이다. 지금껏 숱하게 자손을 퍼뜨려왔으니 내 할 도리는 다했다고 자부한다. 각지에 흩어져 사는 내 후손들도 각자가 맡은 위치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가풍에 따라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한세상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더러 생사의 갈림길에서 움츠러든 적은 많았어도 죽음이라는 굴레 앞에 자유로울 생명체가 어디 있겠나. 이쯤에서 이승과 하직 인사를 한다 해도 여한은 없다. 앓지 않고 그저 자는 듯이 눈을 감을 수 있는 것만도 큰 복이 생각한다.
다만 밝은 빛만큼은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다. 붉은 태양 빛을 피해 어둠만 찾아다니던 삶이었다. 내 몸뚱이를 만천하에 훤히 드러내놓고 죽어가는 건 끔찍스러운 일이다. 존엄사를 택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거라고 줄곧 주장해 왔다. 비록 어둡고 축축하지만 내 집에서 자손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고 싶은 게 죽음 앞에서의 내 마지막 소원이다.
발까지 구르며 부들부들 떨던 안주인이 어느새 식탁 의자 위로 후다닥 올라섰다. 고함을 내지르는 건 여전한데 갑자기 애원하는 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으악! 죽이지는 마, 제발!”
나를 처음 봤을 때보다 곱절은 더 큰 괴성이라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나를 덮치려던 용감한 군인 아저씨는 그 소리에 찔끔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죽이지는 말라고요?'
그렇다면 애당초 소리는 왜 질렀냐는 반발심이 고개를 쳐들게 했다. 아저씨도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두 손을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제발 살생은 하지 말라고!”
난리 북새통을 견디지 못했는지 작은 방에서 문이 열렸다. 가슴 한가운데에 '후한 인심의 소유자’라는 딱지를 떡하니 붙인 반듯하고 잘생긴 젊은이가 거실로 나왔다.
"엄마, 아빠! 그냥 놔두세요. 제가 처리할게요.”
와! 우리 종족 사이에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바로 그 젊은이였다.
‘옳거니, 지난밤 꿈자리가 길하더니 오늘 운수는 대통이렷다.’
생사의 고비에 놓인 처지도 잠시 잊은 채, 내 아들 퀴바가 해준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퀴바는 내 자식 중 호기심이 가장 많은 녀석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어찌나 뛰어난지 남보다 늘 앞장서기를 좋아한다. 습관처럼 매일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맨 꼭대기 층을 정복하고 싶다며 안달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허황한 뚝심에 생명을 저당 잡히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고 누누이 타이르곤 했다.
얼마 전, 숨을 헐떡이며 지하로 뛰어 들어온 퀴바는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무용담에 열을 올렸다. 내 말을 흘려듣고는 친구와 함께 모험을 강행했는데 모두 나가떨어지고 저 혼자만 겨우 목적지에 닿았다는 것이다. 난생처음 고층을 정복한 기쁨을 누리기도 전, 대낮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일대 소동이 벌어졌음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날 '제가 처리할게요’ 하며 퀴바를 안전하게 탈출시켜 준 그 젊은이가 없었더라면 아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까딱하면 내 손으로 자식의 장례를 치를 뻔했으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우리 가족은 그날 무슨 일이 있어도 2103호에는 절대 얼씬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 약속을 저버리는 처지에 놓여보니 부끄러움에 온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제 됐다고 마음을 턱 놓고 있는 사이, 젊은이가 꼼짝 않고 엎드려 있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긴 막대기로 내 몸을 겨눴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나는 아찔한 나머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예상과는 달리 마지막이라는 두려움에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뭐 하고 있어?”
의자 위에서 버티고 있던 안주인의 외마디 소리에 놀라 실눈을 떠보니 내 목숨이 아직 그대로 붙어있는 게 아닌가. 내려칠 줄만 알았던 막대기는 알고 보니 나를 유인하기 위한 생명줄이었다.
‘휴,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그 생명줄에 올라타야 하는데 헛발질만 계속해대는 꼴이라니. 몇 번이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는지 모른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안주인은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들, 빨리빨리 좀 해!"
내 목숨은 여기까지로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죽을 때 죽더라도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하는지 한번 따져 묻고도 싶어졌다.
젊은이는 막대기를 집어치우더니 티슈 한 장을 뽑아서 내 앞에 가지런히 펼쳐놓았다. 눈치 빠른 나는 발을 모아 폭신한 티슈 위로 얌전히 올라섰다. 그는 네 귀퉁이를 하나의 꼭짓점으로 모아 균형을 잡더니 살포시 들어 올렸다. 거꾸로 된 낙하산을 타는 기분이랄까? 하늘로 붕 떠오르는 느낌은 난생처음 맞보는 감정이었다.
슝!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열린 부엌 창문 밖으로 던져졌다. 수직 낙하할 때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꾸벅했는데 제대로 봤는지는 모르겠다. 내 아들 퀴바의 목숨을 살려준 젊은이에게 또다시 보시를 받다니, 우리 집안의 크나큰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만이 내가 해야 할 도리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땅에 나왔으나 종족 번식이라는 재주만큼은 타고났다. 젊은이에게 그 재주를 한 수 가르쳐주고 싶은데 아직 미혼이라는 게 걸림돌이다. 언제쯤 내 훈수가 그에게 빛을 발하게 될지 상상하는 사이, 안전하게 포근한 풀밭 위로 착지할 수 있었다.
0.6이라는 출산율로 나라의 미래가 위태롭다고 아우성치는 통에 나도 요즘 밤잠을 설치곤 한다. 인간들이 잘 먹고, 잘 살아야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으니 당연한 걱정 아닌가. 우리 종족의 무궁한 번식을 위해서는 ‘인구 증가’가 필수조건이다. 이 지구별에서 생사를 함께 나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서로가 손을 잡는 길이다. 우리 종족과 머리를 맞대고 고심하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생기지 않을까. 이 한 몸 던져 인류 공영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다만 내 진심이 왜곡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풀밭을 벗어났다. 빛이 없는 눅눅한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음습하고 퀴퀴한 기운이 감돌았다. 익숙한 아늑함에 몸을 누이니 집보다 포근한 곳이 어디 있을까 싶다. 가장의 귀가를 눈 빠지도록 기다리던 식구들이 우르르 달려와 내 주위를 에워쌌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무엇이든 귀하게 여기는 2103호 젊은이가 머릿속에 뱅뱅 돈다. 언제쯤 비슷한 성향의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이라는 환승 열차를 타게 될지. 나는 그날을 기념하며 번식의 노하우를 전수해 줄 계획이나 세워두련다. 긴장으로 노곤했던 몸이 풀리면서 까무룩 잠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