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왕산에서 맞이한 2026년 해돋이 축제
2026년 새해 첫날이다. 해돋이를 보러 가기 위해 새벽에 눈을 떴다. 집 앞 용왕산에서는 해마다 해맞이 축제가 열리지만, 막상 발걸음을 옮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늘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로 미뤄 두었던 탓이다. 새해에는 사소한 일이라도 미루기를 내려놓는 데서부터 출발하자고 다짐했다. 기체조하는 언니들과 해돋이 구경을 하자는 것도 하나의 약속이었다.
새벽마다 기체조를 하러 다니다 보니 일찍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추위가 문제였다. 영하 11도라는 일기예보에 잠시 망설였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옷을 잔뜩 껴입었다. 장갑을 끼고 모자까지 푹 눌러 쓰자 비로소 추위를 물리칠 각오가 갖춰진 듯했다. 중무장을 한 채 남편과 함께 산으로 향했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산에서 벌써 안내 방송이 울려퍼졌다. 이 추위에 얼마나 올까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소방차와 경찰차, 응급차까지 가지런히 서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새해의 첫 장면을 안전하게 열기 위해 누군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기다려왔던 것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울컥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는 여러 개의 천막마다 각종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핫팩 나눔, 복떡 나눔, 소원지 쓰기, 온기 나눔터, 캘리그라피 등 이름만 보아도 정겨워, 참여해 보고 싶었다. 잔디밭 두 군데나 이동식 난로까지 세워놓는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절로 따뜻해졌다. 옆에 서서 언 손을 녹이다 보니 '내가 잠든 사이 밤을 꼬박 새운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가슴에 새해의 설렘을 새겨주기 위해 이렇게 보이지 않는 손길로 고생했을 분들을 상상해보았다.
무대 쪽으로 가니 '2026년 해맞이 축제'라는 글자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회자는 추위에 몸을 떨며 마이크 테스트를 하고 있었고, 출연자들은 부스 안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사회자가 조영구 씨라는 말에 주변이 잠깐 술렁거렸다. 나는 언니들한테 새해 첫날, 연예인과 함께하는 사진을 한 장 남겨주고 싶어서 꼬드겼다.
"언니들, 연예인을 보고도 아는 척 안 해주면 예의에 어긋나는 거예요."
무대 위로 올라간 언니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연예인을 사이에 둔 언니들은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더니 금세 예쁜 표정으로 포즈를 잡았다. 새해에는 이렇듯 작은 웃음이라도 좋으니 꺼져가고 있는 내 유머 감각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사회자가 너무 추워 보였다. 저 몸으로 무대를 이끌어야 할 텐데 걱정이 되어 내가 받은 핫팩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무대 위로 올라가 사회자에게 핫팩을 건네는데 나도 괜히 긴장이 되었다. 연예인을 직접 만나본 것도 처음이고, 더군다나 무엇을 건넨다는 게 몹시 쑥스러웠다.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을 때, 추위 앞에서는 누구나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악 아가페 가수의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울려 퍼졌고, 이어 어르신 사물 놀이패의 힘찬 장단에 맞춰 운동장이 쿵쿵 진동했다. 얇은 무대 의상으로 추위를 견디면서 한치의 동요 없이 공연을 이어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특히 나이를 잊고 자신의 끼를 마음껏 뽐낸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보람이 서려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쉬이 떠나지 않았다. 남의 눈과 귀를 호강시켜 주기 위해 생각보다 훨씬 혹독한 추위를 감내했던 출연자의 노고에 감사했다. 온기와 열정으로 기분좋게 새해 첫날을 장식했으리라. 야외인데도 방송사고 없이 공연이 끝났을 때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이제 떠오르는 해를 보러 갈 차례였다. 산 아래로 보이는 아파트 숲 사이로 해가 뜬다고 웅성거렸다. 나뭇가지와 멀리 건물들로 시야가 가려져 바다에서 보는 해돋이만큼 시원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굳이 동쪽 바다로 찾아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가까운 산에서 마을 주민과 함께하는 오늘 이 시간도 나에게는 설렘이었다.
오전 7시 47분, 두 빌딩 사이로 붉은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번쩍 솟구쳐 올랐다. 운동장에 모여 있던 아이들, 학생, 어른, 노인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매일 뜨고 지는 해인데도, 오늘 떠오른 해는 색다르게 다가왔다. 비로소 새해를 맞이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덕담을 얹어 사진을 보내 주었다. 한 친구한테서 답이 왔다. 속초 바다에서 붉은 태양이 둥실 떠오르는 동영상이었는데 역시 장관이었다. '친구들아, 건강하자.'
'소원지 쓰기' 부스를 잠깐 들러 엽서를 받아 들었다. 무슨 소원을 적을까 잠시 고민할 틈도 없이 '건강'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이 나이에 건강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모두 건강하게 살자.' 욕심을 비우고 쓴 단 하나의 문장이었다. 모형으로 만든 커다란 태양 위에 소원지를 걸며,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스스로한테 다짐했다.
'복떡'을 받기 위해 늘어선 긴 줄에 우리도 함께 섰다. 떡을 7천 개나 준비했다는 말을 듣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떡집에서의 밤은 얼마나 길었을까. 내가 받은 떡 한 조각에도 누군가의 밤샘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그냥 무심코 받아서는 안 되었다. 떡을 건네는 젊은이의 손이 빨갛게 얼었다. 감사한 마음과 함께 미안한 마음으로 덕담을 나눴다. "애 많이 쓰시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집에 돌아와 매생이를 넣은 굴 떡국을 먹는데 남편이 머뭇거리더니 한참 뒤에 말을 꺼냈다.
"경비 아저씨들 좀 갖다 드리면 좋을 텐데."
이른 아침부터 재활용 분리를 마친 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아저씨들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나였기에 좋은 생각이라고 엄지 척만 해주었다. 순간, 얼마 전에 주문해서 받은 쌍화탕이 떠올랐다. 겨울에는 뭐니뭐니 해도 쌍화탕이 최고 아닌가. 재빨리 쌍화탕 몇 팩을 따끈하게 데워 종이 가방에 담아 남편 손에 들려주었다. 이 따끈함으로 추위를 잠시나마 녹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남편과 나는 그 어느 해보다 새해 출발이 신선했다면서 오늘을 자평했다. 해돋이를 본 기억 하나가 올 한 해를 든든하게 지탱해 줄 것 같다며 마주보고 웃었다. 해맞이 추억을 안고, 오늘 가졌던 감정들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을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했다.
새해 첫날, 주민들을 위해 축제를 준비해 주신 공무원, 경찰, 자원봉사자, 무대를 밝혀준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이 해를 바라본 우리 이웃들의 가정에도 만복이 깃들기를 바란다.
'2026년, 붉은 말의 해에는 제발 세상이 두루 평안했으면.' 하고 조용히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