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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

봇물 터지듯

by 조선여인

남편이 잘 익은 홍시 한 상자를 사 왔다. 둥글넓적한 모양으로 생긴 것이 말랑말랑 감촉도 좋다. 주홍빛 말간 홍시를 들여다보노라니 어릴 적 뛰놀던 고향 집 뒤의 감나무가 눈에 어른거린다. 수호신처럼 서서 늘 고향을 지켜 주던 늙은 감나무가 바로 집 뒤에 있었다. 휘어진 허리에 축축 늘어진 가지마다 빼곡하게 달렸던 그 홍시 빛깔이 바로 이 주홍빛이었다.

외할머니는 해마다 감을 따서는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 두었다. 더러는 껍질을 벗겨 긴 꼬챙이에 꿰어 추녀 밑에 걸어 두기도 했다. 광 문을 열 때마다 항아리에서 풍겨 나오는 감의 향내는 한겨울이 지날 때까지도 이어졌다. 눈 오는 밤, 차디찬 홍시를 한 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싸늘하게 퍼져오던 그 단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할머니는 보이지 않는데 감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외할머니는 아흔이 넘어서도 외손녀를 업고 시장 한 바퀴를 휑하니 다녀올 정도로 건강하셨다. 몇 달 사이에 뼈마디가 손에 잡힐 정도로 살이 빠져 살가죽이 축 늘어졌다. 단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신체 변화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먹이기만 했다. 유달리 외할머니의 정을 듬뿍 받고 자랐기에 갑작스레 찾아온 할머니의 노환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그렁그렁 쇳소리를 내는 숨조차 금방이라도 멈춰버릴까 봐 발만 동동 굴렀다.


손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물기가 말라 오그라드는 입술 위로 물 한 방울을 똑똑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그 작은 물방울도 넘기지 못해 용을 쓰시는 모습을 봐야하는 내 가슴은 미어졌다. 퀭하게 들어간 할머니의 눈을 들여다보던 엄마는 온몸에 힘이 빠져 축 처진 목소리로 한탄했다.

“고목에 물 준다고 살아나겠나.”

그때 엄마 심정은 얼마나 쓰라리고 애통했을까.


곡기를 완전히 끊고 며칠째 물로만 연명하던 때였다. 갑자기 애절한 눈빛으로 딸기를 찾으셨다. 회생의 기미인가 싶어 반가움에 백방으로 딸기를 구하려 다녀봤지만 헛수고였다. 추운 겨울에는 흔하게 볼 수 있던 딸기가 오히려 가을에는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애타는 마음에 손을 놓고 있을 무렵 희소식이 날아왔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외삼촌이 마당의 누런 잔디밭을 헤쳐보니 낙엽 밑에 기적이 깔려 있었단다. 불그스름한 딸기 여섯 알을 발견하게 되다니 내 손으로 구하지는 못했으나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던지. 여러 날을 물로만 연명하던 분이 그 말라빠진 딸기를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모두 잡수셨다. 회생의 기미인가 싶어 엄마와 나는 손을 맞잡으며 비로소 웃었다. 하지만 끝내 회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몇 번인가 토할 듯 삼킬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순간 ,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사그라들기 바로 직전의 촛불이 가장 밝게 빛난다는 말처럼 반짝 기운을 차리는 듯 싶었으나 끝내 눈을 감으셨다. 딸기는 달게 잡수셨으나 스르르 영면으로 들어가려는 눈꺼풀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갑자기 주위가 술렁거리며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부르며 오열하는 내게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할머니 몸에 절대 눈물 떨어뜨리지 마라!”


숲속의 작은 우리집에 목탁 두드리는 청아한 소리와 함께 스님의 반야심경이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조용히 빨려 들어가는 듯한 할머니를 부르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수없이 읊조렸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아흔이 넘도록 왕래를 끊었던 동기간이 보고 싶다던 임종 시의 말씀이 오래도록 귓가에 윙윙거렸다.


삼십 리 밖에서까지 신부의 고운 얼굴을 구경 왔다더니 염을 잡수실 때의 뽀얀 얼굴은 마치 분 바른 새색시처

럼 예뻤다. 언젠가 보았던 흑백 사진 속의 무명치마저고리를 입은 할머니가 되살아난 듯 맑은 빛을 뿜어냈다. 참빗으로 곱게 빗어 비녀로 쪽을 진 머리도 늘 그랬던 것처럼 단정했다. 죽음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베 버선으로 싸맨 발치에 슬며시 손을 갖다 대보았다. 역시나 싸늘했다.


시집와 평생을 바친 고향의 뒷산으로 꽃상여가 올라가던 날, 이름 모를 산새들의 날갯짓을 따르는 상두꾼의 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어야 어어야 아...”

“모진 풍파 잊고 가세. 어어야 어어야 아...”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난 코스모스가 소리 장단에 맞춰 한들거렸다. 우리는 상여꾼의 구성진 가락에 맞춰 곡을 하며 산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붉은 휘장을 두른 할머니가 좁디좁은 관에서 땅으로 옮겨질 때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린 채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을 뿐이다.


정신을 차려 사방을 둘러보니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울창했고, 산 앞으로는 실개천이 졸졸거렸다. 발끝에는 잔잔한 풀꽃들이 채였고, 풀숲을 헤치는 벌레들은 작은 소리로 울어댔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은 따사로운 햇살을 마구 쏟아내며 이 모든 것들을 포용했다. 자연은 길고 긴 여행길에서 돌아온 사람을 감싸 안으며 너그럽게 품어줄 준비를 이미 마친 듯 보였다. 산 아래 잘 뚫린 길로 차가 지나다니고, 도란거리는 사람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살아생전의 추억을 가끔이라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마음이 쓰라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외할머니와 헤어지던 그 가을이 바로 엊그제 같기만 한데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말랑거리는 홍시를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본다. 할머니의 손길이 아이들 얼굴에, 눈동자에 진하게 배어난다. 땀띠 마를 새 없이 나를 업어 키우던 사랑을 내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나눠주고 가셨기 때문이다. 맛나게 홍시를 먹는 아이들과 주홍빛 물이 뚝뚝 떨어지는 홍시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곳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왔을 텐데, 맛이라도 한 번 보셨을까.'


할머니가 계신 곳에는 지금쯤 벌레들 노래 연주에 맞추어 풀꽃들이 한들한들 춤을 추고 있겠지. 날마다 새들이 놀러 와 먼 세상 이야기도 들려줄 테니 많이 외롭지는 않으시겠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해도 든든한 소나무가 지켜 줄 테고, 푸른 하늘이 언제나 지켜보고 있을 테니 편안하시겠지.


남편이 내민 홍시 하나 받아 들고는 결국 목이 메어 차마 입에 대지 못한다. 할머니는 또 다른 세상에서 사귄 동무들과 잘 지내고 계시련만. 한번 맺은 인연을 끊지 못하는 나는 봇물 터질 듯 그리움을 왈칵 쏟아내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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