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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Jan 16. 2023

신줏단지 머리카락 모시기

  “이제 뽑기에는 역부족일 테니 염색 좀 하세요.”


  요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는 새로운 인사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삐죽이는 내 흰머리털을 콕 집어 가리키던 사람들. 친절이 몸에 밴 그들은 나만 보면 뽑아버리라는 말을 목청껏 인사 대신했다. 물론 머리 색깔이 무슨 대수랴 싶었던 나는 무심코 흘려버렸지만.


  귀가 얇아 하찮은 것에는 솔깃해도 염색하라는 데에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말까지 꺼내 들며 얼버무렸다. ‘생긴 대로 살자’라는 내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덕에 고집불통이라는 커다란 이름표까지 얻어 가슴에 달았지만 내 주관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런 나의 고집이 단번에 꺾일 줄이야.

친정에서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때였다. 갑자기 어머니는 안쓰런 표정을 지으며 한사코 봉투를 물리셨다.


  “흰머리 성성한 자식한테 돈을 받다니.”


  어머니의 눈동자가 서늘해지더니 이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부모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을까. 환갑을 넘기고도 덩실덩실 춤을 추며 부모 앞에서 재롱을 떨었다는 효자 얘기도 었으면서.

사람들의 핀잔 섞인 강요가 아닌 어머니의 애잔한 넋두리가 꿋꿋하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북풍과 태양의 내기’에서도 길 가던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것은 역시 따스함이었다.

  

  머리로 스며드는 백발에 대한 한탄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려 했던 시조 한 수가 있다.


  '한 손에 가시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시조를 읊는 동안 문장마다 숨어있는 작가의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세월의 발자국을 따라 시나브로 바짝 다가서는 노화. 자연의 이치라지만 누구라도 막아서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칠흑처럼 검은 머리채를 휘날리며 당당했던 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어른들의 희끗희끗한 머리를 보며 중후한 멋이 풍긴다고 수선을 피웠고, 한 술 더 떠 로맨스그레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기분 내키는 대로 쏟아냈던 말들, 이제라도 주워 담고 싶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칼을 들춰 본다. 아니, 노려본다는 말이 더 어울려나. 귀밑으로 돋아난 볼썽사나운 흰머리털에 눈 박힌다. 검은 털 제치고 고개를 바짝 쳐든 꼴이 아주 밉상이다. 참고 또 참아봤지만 더 이상은 놔둘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것 같다. 머리 좋은 사람이 머리를 쓰면 하얘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대머리가 된다는 친구의 우스갯소리에도 웃을 기분이 아니다.


  염색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자 먼저 선배부터 찾기로 했다. 언제나 한 손에 거울 들고, 또 한 손에는 빗을 들고 사는 멋쟁이였다. 나한테도 ‘후배여, 미를 찾으라’는 구호를 부르짖곤 했다. 선배는 오늘따라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푹 가라앉아 한숨만 푹푹 내쉰다. 땅이 훅 꺼질 것만 같다. 틈만 나면 인정사정없이 잡아 뽑더니만 머리가 빠져 울고 싶은 심정이란다. 머리 감을 때마다 한 움큼씩 도망가는 바람에 입맛도 함께 달아다면서 끌탕이다.


  “반백이면 어떻고, 올백이면 어때? 염색하면 감쪽같은데.”


  ‘나만 보면 뽑으라고 성화를 대더니만 이제는 뽑지 말라는 건가?’


  속으로 구시렁대었다. 어설픈 위로를 했다가는 핀잔으로 되돌아올 확률이 높기에 눈치 살폈다.

  빗질을 할 때마다 왜 검은 털만 빠지냐며 울부짖음에 가까운 푸념이 늘어진다.

머리가 훌렁 벗어져서 속알머리 없다느니, 주변머리 없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는 선배가 상상되었다. 그 순간, 측은지심에 ‘쿡’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거울 속에 얼굴을 박고 있던 그녀,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조금 전 상상했던 걸 들킨 것 같아 지레 움찔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머리숱 많다고 지금 내 앞에서 자랑하는 거야?”  


  숱이 많아 붕 떠 보이는 머리가 평생 약점인 나한테 괜한 생트집이었다. 앗, 그렇네. 나이 들면 숱 많은 것도 자랑이 되는구나.  

  선배가 듣거나 말거나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는요, 흰머리털 한 올이라도 신줏단지처럼 잘 모시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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