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학창 시절부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토머스 에디슨의 명언을 귀에 닳도록 들었다. 성공하려면 최대한 노력하고 실패를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시작할 것을 누구나 들어 온 말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이런 명언들을 언제부터인가 거짓말이라도 여기고 있다. 수시전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내신은 한 번이라도 시험을 망쳐서 등급이 떨어진다면 치명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수시전형인 ‘학생부 종합 전형’이 비교과 영역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정성적인 평가보다는 정량적인 평가인 내신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한 번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실패는 ‘가슴 아프고’, ‘남보다 뒤처지는 패배자’라는 그런 이미지를 마음속에 품으면서 자라게 되었다. 학생들을 상담할 때 종종 여학생들이 눈물을 보이곤 한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간단하다. “이번 시험을 못 봤어요.” 내신 1, 2등급 나오다가 이번에 수학이 3등급으로 떨어졌는데, 실수로 문제를 망친 자신을 자책하며 자신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 실패가 성공이 어머니일까?’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면 아이들 주변은 왜 실패를 용인하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까?’
하지만 실패라고 다 똑같은 실패가 아니다.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실패가 있고, 자신을 패배자로 인식시키는 시간 낭비 실패도 있다. 성공 혹은 패배를 결정하는 실패는 자신이 정말 이루고 싶은 꿈이라는 기준점과 관련되어야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발판이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일하다 발생한 실패는 자신의 이미지만 구기는 시간 낭비 실패다.
“패배는 이기는 연습이었다. 승리를 위한 리허설이었다. 나는 다시 연승을 시작했고, 21주 동안 세계랭킹 1위를 지켰고, 그랜드슬램 대회 결승전에서 매치포인트를 올리기 시작했다.” -마리아 샤라포바-
마리아 샤라포바의 패배는 시간 낭비 패배인가? 그렇지 않다. 세계랭킹 1위를 지키겠다는 목표를 위한 패배다. 자신이 정한 꿈을 이루기 위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만약에 샤라포바가 모델을 꿈꾸었다면, 코트에서 발생한 패배는 이기는 연습이 아닌 단지 시간 낭비에 불과한 의미 없는 것이다. 물론 패배는 쓰지만, 계속 입에 쓸지, 아니면 달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쓰다고 해서 뱉어낼 수도 없다. 이미 삼켜버렸으니까!
시험만 끝나면 아이들은 자신들을 패배자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시험 망쳤어요!”
“개 망했어요!”
먼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학생들을 칭찬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고 노력과 비교하면 만족스럽지 못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 학생들은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시험 끝나고 결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지만 한 번의 시험을 망쳤다고 해서, 자신의 꿈까지 지워버려 망쳐서는 안 된다. 그대로 주저앉는다는 것은 자신이 시도한 노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무대에서 멋진 감동을 주기 위해서 가수와 댄서들은 반드시 리허설을 한다. 아무리 무대에서 베테랑급인 가수라도 리허설을 절대 무시하지 않는다. 그 누구라도 실수가 나오기 때문에 완벽해질 때까지 반복하여 만족스러운 공연을 보여준다. 실패도 마찬가지로 리허설이다. 리허설 없이는 공연이 성공적일 수 없듯이 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
실패했다면 기왕이면 무엇이라도 조금 배워야 하지 않을까? 똑같은 실패와 실수를 반복한다면 이것은 꿈에 대한 간절함이 없거나 꿈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학생 중에 틀린 문제만 매번 틀리는 학생들이 있다. 시험 끝나고 나서 ‘또 틀렸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걸 보면 실수는 습관이다. 차라리 몰라서 틀렸다면 배우면 되지만, 알고 있는 것을 틀린다는 것은 빨리 고쳐야 할 습관이다.
일본은 15세기 말부터 대략 300명 이상의 무사들 전쟁이 활발했다. 그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배해 밀려나게 되었다. 이에야스의 패배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다. 자신의 장남을 자결시켜야 했고, 한때 자신의 라이벌이던 히데요시에게 복종만 요구되는 감당하기 어려운 패배였다. 157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배하고 돌아가자마자 화가를 불러 패배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한 후 벽에 걸어 놓았다.
이에야스는 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했을까? 패배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삼아 두 번 다시 그런 패배를 하지 않겠다고 매일 다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그림을 보면서 이에야스는 전쟁에서 패한 원인을 분석하고 보완하는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결국은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 12년 후에 일본을 장악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실수는 무대를 망쳤을 때다. 다음날 일어났을 때도 세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미디 배우 패튼 오스왈트
실패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기준점인 자신의 꿈에서 일어나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기에 남들의 비난을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실패했다고 세상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인생도 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도하지 않는 자체가 변함을 일으킨다. 그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한 단계 남들보다 더 성장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실패와 배움을 통해서 완벽함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야구를 좋아한다면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알 것이다. 베이브 루스가 처음부터 타석에 올라가 배트를 휘두를 때부터 홈런을 날리지는 않았다. 루스는 통산 714개의 홈런을 날렸다. 그런데 714개의 홈런을 치기 위해서 실패가 없었을까? 베이브 루스는 삼진만 1,300개 이상을 당한 실패가 있었다. 1,300개의 실패가 있었고, 그 실패를 통해 배움을 얻어가는 과정을 통해 홈런왕이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동등하게 주어진다. 그 기회를 피한다면 실패는 겪지 않을뿐더러 성공이라는 맛도 보지 못한다. 그 기회를 우리는 다 완벽하게 성공시킬 수는 없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꿈을 달성해 만족감을 얻는 것은 대략 20%에 불과하고 나머지 80%는 실패와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꿈을 달성하는 20%를 있게 한 원동력은 80%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꿈을 향한 길은 가시밭과 같은 실패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보는 시각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꿔 배움을 얻는 기회로 활용할 때, 기준점이 되는 실패를 축적하게 될 것이다. 축적이 쌓이고 쌓일 때 분출되는 것은 오직 꿈의 달성이다.
“실패는 기묘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감출수록 커지고 악화하다가도 일단 드러내기 시작하면 성공과 창조를 가져온다.” -실패학의 창시자인 하타무라 요타로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