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과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이 말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양자역학이 시작될 때쯤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이번 글은 아인슈타인이 이 말을 왜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사람은 어떻게 사물을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어떻게 보는지는 모르겠고 빛은 필요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빛이 존재하기만 하면 사물을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영화관에 가면 스크린은 환하게 보이지만 옆자리 사람의 얼굴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빛이 있어도 잘 보이지 않는 곳이 있다.
그렇다면 영화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빛이 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어렸을 적, 어둡고 아늑한 나만의 아지트에서 동화책을 읽으려 할 때 우리는 책을 비추었지 그 손전등을 눈에 바로 쏘지 않았다. (위험하니 따라 하지 마세요.) 즉, 책을 보고 싶을 때 빛이 책을 향하게 비추었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경험적으로 사물을 보기 위한 빛의 경로를 알고 있었다. 사물을 본다 함은 빛이 사물을 비추고 그 빛이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글에서 빛의 이중성에 대해 소개했다. 빛은 파동이고 입자이다. 빛이 입자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를 바탕으로 사물을 보는 과정을 다시 서술해 보자. 광원으로부터 나온 빛 알갱이가 사물을 맞추고 튕겨져 나와 우리 눈에 들어오면 우리가 그 사물을 본 것이다. 알까기, 구슬치기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빛 알갱이의 크기는 잘 모르겠으나 빛 알갱이를 손으로 집어 눈으로 본 사람은 없으므로 그 크기가 식별 불가능할 만큼 작다는 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눈으로 달만큼 큰 사물, 사람만큼 큰 사물, 사탕만큼 큰 사물을 관측한다고 하자. 빛 알갱이에 비하면 큰 사물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작은 빛 알갱이가 큰 사물에 부딪혔다고 한 들, 사물이 이 빛 알갱이에 의해 위치가 바뀌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반면 빛 알갱이만큼 작은 물체는 어떨까? 빛 알갱이만큼 작은 입자 "전자"말이다. 알까기 게임을 다들 해보았을 것이다. 크기가 같은 알끼리 부딪힐 때 표적이 된 알이 튕겨져서 위치가 변한다. 내 알로 상대팀 알을 모두 맞춰서 말판 위에서 떨어뜨려야 이기는 게임이니까.
이 논리를 그대로 전자를 관측하는 상황으로 가지고 와보자. 전자를 좀 보려고 하는데, 빛 알갱이가 전자를 치게 되고 전자는 빛 알갱이 때문에 튕겨져 나가 위치가 변하게 된다. 관측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금 보고 있는 전자의 위치가 원래 있던 곳인지? 튕겨져서 위치가 변한 곳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전자를 볼 때마다(관측할 때마다) 전자의 위치가 다르게 나왔다. 그래서 전자의 위치가 "어디다!"라고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이 위치에 있을 가능성"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전자가 이 위치에 있을 "확률"로 말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양자역학이 주로 확률로 서술되는 이유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양자역학을 "확률"로 서술하면서 나온 말이다. 양자역학이 나오기 전 고전역학에서는 물체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알면 시간에 따른 물체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양자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그 물체에 대한 정보를 다 모르기 때문에 확률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정보를 다 알기만 하면 고전역학처럼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차이로 과학자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그룹은 확률로 표현되는 게 맞다! 두 번째 그룹은 확률이 아니다! 결국엔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 세 번째 그룹은 중립. 이 싸움에 나였다면 '아무나~이겨라~'하고 있었겠지만, 한 과학자는 이 논쟁을 풀 수학 부등식을 발표했다. 이 부등식에 논쟁의 승패가 갈리는 것이다. 결과는 첫 번째 그룹의 승리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양자역학은 확률로 서술되고 있다.
수학 부등식으로 종결된 싸움이라니. 멋진 싸움이다. 이게 바로 지성인들의 싸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