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화가는 고흐인 것 같다. 강렬한 색감과 마티에르의 고흐 그림을 좋아해서일 수도 있지만, 불꽃같은 그의 삶 때문에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의 방학을 맞아 고흐전 예매를 했다가 관람객이 엄청나게 몰린다는 글을 보았다. 역시 고흐의 인기란. 취소할까 잠시 생각했는데, 아이가 꼭 보고 싶다고 해서 그냥 가기로 했다.
관람객이 많을 때, 내가 전시를 보는 방식이 있다.
첫째, 가급적 평일에 간다.
둘째, 오픈런은 기본이고, 오픈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간다. 주말이라면 더 일찍 간다.
셋째, 전시 초입에는 작가 연표나 설명 패널로 정체가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한적한 뒤쪽부터 감상한다. 게다가 하이라이트 작품은 주로 뒤쪽에 있기 때문에 사람이 없을 때 여유로운 감상이 가능하다. 앞부분은 이후에 다시 보는 것으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뮤지엄 갔을 때도 오픈런을 했었다. 퇴장하면서 본 어마어마한 인파들이다.
예술의 전당 반 고흐 전시는 10시 오픈이고, 우리는 9시 30분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티켓 발권은 40분부터였다. 인터넷 예매를 했었어도 실물 티켓으로 교환해야 한다. 발권 후 입장 번호표를 뽑는다던데, 바로 입장줄을 서게 해 주셨다. 그리고 조금 일찍, 9시 50분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전시는,
1. 네덜란드 시기
2. 드로잉 작품
3. 파리 시기
4. 아를 시기
5. 생레미 시기
6.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
이렇게 여섯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나는 바로 파리 시기로 이동했다. 네덜란드 시기와 드로잉 작품은 고흐의 초기작으로 많이 어둡다. 고흐의 그림은 파리 시기부터 밝아지기 시작해서, 우리가 아는 유명한 작품은 모두 아를과 오베르 쉬르와즈에서 그려진 그림이다. 역시 뒤쪽은 사람이 거의 없어서 쾌적한 환경에서 주요 유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나는 만족했지만 전시를 시작부터 순서대로 봐야 하는 사람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우리 아들이 그런 성격이다. 아들은 계속 앞부분으로 다시 가자고 재촉했다.
결국, 우린 앞으로 이동했다 다시 뒤로 갔다 왔다 갔다 하며 관람을 했다. 한 번씩 돌 때마다 관람객이 무섭게 늘어났다. 11시가 넘어서자 인파가 가득 차서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평일 오전이 이 정도라면 주말은 어마어마할 것 같다.
예상했던 대로 대표작들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자화상', '씨 뿌리는 사람', '착한 사마리아인' 유화 작품과 '감자 먹는 사람들'과 '가쉐 박사' 판화가 있었다.
전시 공간은 전체적으로 파란색이었다. 고흐의 노란색의 보색이라 선택한 것인지? 그리고 작품 벽 앞으로 낮은 턱이 있어서 차단선 없이도 자연스럽게 작품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사진 촬영은 금지였다. 이런 경우 포토존을 만들어 주던데 포토존이 없는 것은 좀 아쉬웠다.
굳이 포토존을 꼽자면 전시명이 적힌 파란 벽인 것 같은데, 한 곳은 입장줄 서는 장소라 제대로 사진을 찍을 수 없고, 다른 곳은 한가운데 배전반이 노출되어 있다.
고흐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만 27세(1880년)에 화가가 되어, 약 십 년 간 그림을 그리고 만 37세(1890년)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아는 대표작들은 생의 마지막 단 3년 동안 그린 것이다. 그리고 사후, 정확히 100년 뒤인 1990년에 '가쉐 박사의 초상'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낙찰이 되었다.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화랑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목사가 되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신 벨기에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여러 차례의 실패 후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화가가 된 후 파리로 이주해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작품의 색조가 점차 밝아졌다. 이후 프랑스 남부로 이동하여 지중해성 기후 아래에서 밝은 색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은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와즈에서 보냈다.
세계지리 교과서에 화가의 작품과 기후의 관계를 표시한 지도가 있었는데, 고흐의 작품은 지중해성 기후에 해당했다. 고흐는 네덜란드 사람인데 왜 지중해성 기후에 해상 되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즉, 네덜란드 사람이지만 그의 대표작은 남부 프랑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은 그림들이다.
여기에서 아들의 추가 질문이 있었다.
당시 미술의 중심은 프랑스 파리였다. 화가가 되려면 파리로 가야 했다. 네덜란드인 고흐도, 스페인 사람인 피카소도 파리에서 활동했다.
전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은 로마를 대신해 파리가 유럽의 중심이 되었음을 과시하려 했고, 이를 확인시켜 줄 방법이 미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럽 전역에서 미술품을 약탈했는데, 특히 이탈리아에서 많은 미술품을 가져갔다. 이렇게 탈취한 미술품은 루브르 박물관을 채웠고,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거치며 미술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파리로 미술의 중심이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고흐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이 있다. 그가 스스로 총을 쏜 것은 맞지만, 정신병으로 인한 충돌적인 행동일 수도 있고, 오발탄이었을 수도 있다. 스스로 걸어서 숙소까지 돌아갔으니 치명적인 것도 아니었다.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작가가 죽으면 작품값이 오른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테오의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부담 주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여전히 작품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미술관에 간 의학자'에서 저자는 의료사고 가능성을 말했다. 가셰 박사는 고흐의 몸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지 않고 상처를 소독만 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 고흐의 복부에 남아 있던 총알이 염증을 일으켰고, 패혈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혹은 계속된 출혈로 인한 출혈성 쇼크였을 수도 있다. 자살이든 아니든 처치를 잘했으면 살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오래전, 혼자 갔던 유럽 배낭여행에서 오베르 쉬르와즈에 갔었다. 한적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마을 구석구석마다 고흐의 흔적이 있었고, 그 장소마다 고흐가 그린 그림 패널이 있었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 내가 방문한 날 하늘은 흐렸고 적막한 들판에 나 외에는 까마귀 울음소리만 들려서 더 쓸쓸했다. 이곳에서 고흐는 스스로에게 총을 쏘았다.
그리고, 혼자 걸어서 숙소 자기 방까지 왔다. 소식을 들은 테오가 찾아왔고 형제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네덜란드 말로 했기 때문에 그 형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고흐가 총을 쏜 밀밭 바로 옆은 공동묘지이다. 그리고 그곳에 고흐와 테오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이 날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어떤 미친(?) 한국 사람이 자기가 전생에 고흐라고 했다. 무덤에 놓인 꽃 보셨어요? 제가 제 무덤에 가져다 둔 거예요.
전시를 보고 예술의 전당 내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들이 말했다.
"고흐는 왜 화가가 되었어? 그냥 목사 하지. 화가는 너무 힘들잖아."
초딩이 너무 현실적인 거 아니냐.
"고흐가 목사가 되었으면 우리는 고흐의 그림을 볼 수 없었잖아."
아들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요즘 영화에 많이 나오는 것처럼 타임슬립해서 총 맞은 고흐를 치료해 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고흐가 오래오래 더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그래,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고흐도 인정받고 말년이 좀 편해졌으려나?
고흐전만 보고 가기는 아쉬우니 전시 두 개를 더 보기로 했다. 예술의 전당 전시는 대부분 입장권이 비싸지만 잘 찾아보면 무료나 비교적 저렴한 전시가 있다.
홈페이지 상으로는 무슨 전시인지 잘 몰랐다. 평범한 그림 같은데, 실물을 보면 이것은 퀼트 작품이다!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만든 작품. 그 정교함에 감탄하게 된다. 청바지 화가 최소영 작품도 떠오르게 하고.
아들도 작품을 너무 좋아해서 꽤 오랜 시간 전시장에 머물렀다. 마침, 작가님이 계셔서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특이하게 시각디자인 전공이셨다. 학부 때 섬유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전공을 접했고, 디자이너로도 일 했고, 예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셨다. 그런 다양한 경험들이 집약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작 직업화가로는 두 번째 전시라고 한다. 그런데도 까다로운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하다니. 예술의 전당에서 작가님의 가능성을 본 듯하다.
먹과 탑의 화가라고 불리는 박진우 작가 전시이다. 작업 방식이 특이했다. 먹을 탁본해서 탑 형태를 그린다. 석재를 하나하나 쌓아 만드는 탑 결구 양식과 같다.
예술의 전당 공연·전시 티켓을 제시하면 입장료를 할인해 준다.
현재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도 하고 있다. 카라바조 전시에는 사람이 없었다. 카라바조를 볼 걸 그랬나.(주말에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를 홍보하고 있었다. 기행으로 유명한 장승업 '취화선'같은 느낌일까. 카라바조의 이름은 미켈란젤로이다. 한 세대 앞의 미켈란젤로와 구분하기 위해 이름 대신 출신 마을 이름인 카라바조로 불린다. 반면 장승업은 한 세대 앞 천재인 단원 김홍도를 따서 나도 원이다는 뜻으로 '오원'이라는 호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