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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글 쓰는 여자

by 사막여우

1. 나혜석은 누구인가?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라는 것이다.

수원아이파크 미술관, 나혜석 전


수원출신이다. 사진은 수원아이파크 미술관의 나혜석 전이다.

그리고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많이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일본 유학을 했다. 전공은 유화. 당시 도쿄 조선 유학생들 사이 최고의 인기였다. 조선 유학생들 중에 여성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심지어 예쁘기까지 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잘 모르겠나, 당시 엄청난 미인이었다고).


나혜석의 '결혼서약서'

그녀의 '결혼서약서'는 유명하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주시오.


최승구는 나혜석의 죽은 애인이다. 부부는 신행 중 그 묘에 들러 비석을 세워준다.



기차 타고 유럽 여행, 그리고 미국 여행


당시 신문에도 실렸던 여행출발 전 부부의 사진이다.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 시베리아를 지나 파리까지 갔다. 파리에서 체류하면서 유럽의 각지를 여행하고, 배를 타고 미국 여행도 다녀왔다.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지금 내가 봐도 부럽다.

그런데, 이 여행에서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이혼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나혜석의 '이혼고백장'


나혜석은 남편과의 만남부터 결혼생활, 파리에서 최린과의 불륜,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글로 발표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파격적이다. 그리고 이혼 후 힘들게 살다가 행려병사한다.



2.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나혜석의 소설
2부는 나혜석의 여성과 연애, 결혼에 대한 글들
3부는 나혜석이 이혼 후 조선의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조하는 남성 이기주의를 고발한 글들.
4부는 나혜석의 육아에 대한 글들
5부는 나혜석의 정치, 근대 여성 직업관에 대한 글들.



만혼 타개 좌담회

각 부 사이사이에 있는 '만혼 타개 좌담회'가 재미있다.

만혼 타개 좌담회

그 시절에도 시집, 장가를 가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이 근심이었나 보다.

만혼 타개 좌담회


김기진 : 어느 생물학자의 말을 듣건대 일단 딴 남성을 접한 여자에게는 그 신체 혈관의 어느 군데엔가 그 남성의 피가 섞여 있지 않을 수 없대요. 그러기에 혈통의 순수를 보존하자면 역시 초혼이 좋은 모양이라 하더군요.

1930년대의 생물학 지식이란. 김기진 씨 발언.



이 시대에는 백화점 판매원이 고급직업이었다.

만혼 타개 방안으로 나온 의견, 중학교부터 남녀공학을 도입하자.

현재 대부분의 중학교가 남녀공학이지만 만혼, 비혼이 더 많아졌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나는 나혜석의 '나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크게 와닿았다.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릴 적부터 페미니스트 말을 많이 들었다. 단지 사람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했다. 나는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


나혜석은 엄마의 희생을 당연시하지 않았다.

임신, 출산, 육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구구절절하게 말한다.


나혜석은 피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늘날에도 학교에서 피임을 가르쳐야 하느냐 마느냐 논란이 되고 있는데, 여성의 정조가 목숨보다 중요했던 시대에 피임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나혜석은 동거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시험 결혼'이라고 해서 그 결혼이 행복할지를 알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결혼의 목적은 한 명의 배우자를 얻기 위한 것이며, 자녀는 부산물이라고 이야기한다.


나혜석은 100년을 앞서간 페미니스트라고들 하는데, 공감한다.




3. 나혜석의 논란


나혜석 일생에 대한 내용은 나혜석의 아들인 김진(전 서울 법대 교수)이 쓴 '그땐 그 길이 그렇게도 좁았던고'에 잘 나와있다. 아들이 쓴 어머니 나혜석에 대한 글인데,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글에 절절히 묻어난다. 그리움이 아니다. 미움이다.

아들 김진은 엄마 나혜석이 유럽여행을 떠날 때 생후 8개월이었다. 숙모의 젖을 먹으며, 숙모와 숙부가 친부모님인 줄 알고 자랐다. 2년 후 돌아온 부모님을 알아보지 못했을뿐더러 숙모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부모님은 돌아온 후에 이혼을 했고, 생모인 나혜석이 아닌 새어머니의 손에 자란다.

이 책은 좀 읽기 불편했었는데, 그건 아들이 어머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에 관한 책을 쓰는 핑계로 친일파로 불리는 아버지에 대해 변명의 글로 가득 차 있었다.



나혜석은 친일파인가?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나혜석과 친했던 이광수 모두 친일파이다.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진에 기록되어 있는 친일파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도 끌려갔었다. 일제강점기에 외교관이자 변호사였다. 김우영은 나혜석과 미국 여행을 갔을 때 동포들을 만난 자리에서 친일파라는 이유로 한 미국 동포의 칼을 맞아 죽을뻔한 위기도 겪는다.

불륜남 최린은 독립선언서를 선언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지만 이후에 변절한 대표적 친일파이다.

이광수는 설명이 필요 없는 친일파.

나도 나혜석이 친일파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잘 모르겠다. 나혜석은 3.1 운동 시위 관련자로 5개월간 수감된 적도 있다. 그리고 이후 독립운동가들에게 꾸준히 경제적 지원도 한다.
문제는, 남편 김우영도 독립운동가들을 같이 도왔고, 김우영은 3.1 운동 시위로 수감된 자들을 위한 변호도 했다. 아들 김진은 이 사실을 들어 아버지는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4. 그래도, 나혜석은...


'그땐 그 길이 그렇게도 좁았던고'에서 김진은 나혜석이 영리했으나 이기적이고 시대를 읽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나혜석이 '이혼고백장'을 낸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어리석고 잘못된 판단이었다. 나혜석은 그렇게 글을 냄으로써 루머로만 떠돌던 자신의 불륜을 기정사실화 했다고. 그래서 작가로 재기할 기회를 영영 잃었다고 말한다. 실제 나혜석은 이후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심지어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지금까지도 공인으로 활동하는 여성들에게 스캔들은 치명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대체로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를 최대한 감추거나 침묵으로 일관하는 방식을 택해 왔다. 그것이 적어도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 안전한 방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혜석은 정반대의 길을 택하여 직접 말하고 직접 글을 쓰며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그 대가를 너무나도 혹독하게 지불했으나, 나혜석은 자신의 말과 글을 중단하지 않고 공개했다. 남성 중심의 전근대적 사회가 정작 바라는 일은 여성들의 발화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나혜석은 이러한 구조를 오랫동안 체험했기 때문에 침묵이 보신의 길임을 분명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순에 저항했다. 남성 중심의 전근대적 사회와 지난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혜석의 삶과 글은 역사적 가치를 획득할 자격을 갖추었다. (p153)


침묵하지 않고 당당하게 발언하는 나혜석. 그 점에서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수덕여관

나혜석이 마지막 생을 살았던 수덕여관이다. 수덕사 앞에 있다.
그녀는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수덕여관
수덕여관




그리고,


나혜석은 나문희의 고모할머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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