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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Jul 24. 2023

마지막으로 춤추고 노래한 게 언제인가요?

오늘을 사는 방법

어른이 되었다는 유치한 증거 중에 하나는 아무 데서나 춤을 추지 않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몸을 흔든다. 잘 걷지도 못하는 아기조차 두 팔을 잡아주면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며 흥을 표현한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마지막으로 춤추고 노래한 게 언제인가? 만약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어딘가 응어리진 감정들이 있지 않은지 살펴주어야 한다. 좀 더 나아가자면, 종종 찾아오는 우울의 원인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언어가 발달되기 이전 원시시대에도 인간은 춤과 노래를 즐겼다. 춤과 노래는 지구의 생명체 중에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표현방식이 아닌가. 


하지만 나에겐 언젠가부터 춤이란 두려움의 존재,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다. '춤'이라는 행위가 직업으로 분류되는 순간 그 이외의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것은 별난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듯하다. 춤을 배우기 위한 학원이 따로 있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나마 돈을 내고서라도 춤이라는 별난 것을 시도해 보는 사람들은 흥의 맛을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글쎄. 춤이 무서워진 나도 과거에는 춤을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본인도 믿기지 않지만 대학교 1학년 때에는 나름 센터도 맡았다. 심지어 춤을 알려줬다. 고등학교 때 학생회 생활을 하면서 무대 위에서 친구들과 춤을 많이 추었는데, 이때 움직임의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몸치도 노력하면 치료가 된다는 걸 이때 알았다. 즐거웠다. 좋은 기억으로 아련하게 추억하는 것들은 대부분 지금은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춤이라는 것이 정답은 없다고들 하지만, 춤다운 춤을 추어본 기억은 이때가 마지막이다. 북적북적한 클럽을 즐기는 타입도 아니거니와, 페스티벌에서도 기껏해야 방방 뛰는 정도이니 말이다. 한 가지, 세상이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자발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생기가 있었다. 살아있는 기운 말이다. 머릿속에서 표현하는 수많은 감정들이 몸짓으로 보이는 과정은 인간으로서 여기에 존재함을 증명하는 듯하다. 


노래는 춤보다 어른들과 조금 더 가깝다. 흥얼거림 또한 노래이니 말이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음악을 사랑한다. 음악은 삶을 치유한다. 취향을 만든다. 어디서든 마음의 준비만 되어있다면 할 수 있는 게 노래다. 특히 우리나라는 노래하는 것에 관대하다. 번화가에 노래방이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니 말이다. 슬플 땐 슬픈 노래를 부르고, 기쁠 땐 기쁜 노래를 부른다. 나와 같은 감정을 표현해 줄 노래를 신중하게 선곡하고, 기꺼이 감정을 취한다. 때로는 노래방 옆칸에서 들리는 음치 이별 노래가 그렇게 구슬플 수가 없다. 


아이들은 어디서나 춤과 노래를 보인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다시 춤과 노래를 삶으로 표현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는다. 노인은 자신의 미래를 애타게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 두 인물은 현재를 감상할 줄 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집중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만약 마지막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한 게 언제인 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나의 감정을 살펴본 게 언제인지 생각해 보자. 어쩌면 오늘이 아닌 어제, 혹은 먼 미래에 마음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에 머물러야 행복할 수 있다. 순간의 감정을 잡아두어 눈으로 확인하는 생기를 의도적으로 쥐어줄 필요가 있다. 그 유치하고 단순한 방법은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으면 어떤가. 혼자서도 즐거울 수 있고, 함께하면 유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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