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윤슬이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맑은 날, 한강에서 바라보는 윤슬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볼 법한 빛감을 띈다. 아침 햇살과 여름 노을, 가을 하늘과 겨울 호수를 닮은 풍경이다. 나라는 사람도, 내 인생도 그렇게 빛을 띄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제 내 외면에서 가장 빛을 띄는 건 혈색이 좋은 포동포동한 뱃살이다. 더 이상의 곡선미를 사양하겠다며 지난 여름 운동을 시작했고 나름 석 삼(三)자 근육이 새겨지려 했다. 자꾸 지워지는 건, 곰돌이 푸의 세계관을 지향하며 행동에 옮기는 습관 때문이리라. 꿀맛 같은 음식들이 나의 뱃살을, 인생의 행복을 높이높이 쌓아간다. 머리로 보면 희극, 눈으로 보면 비극이다.
먹을 복을 타고났다는 얘길 들었다. 생일도 추석 때라 늘 햇곡식과 햇과일로 생일상을 맞이했고 어느 곳에 가더라도 꼭 식사 타이밍이거나 음식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엄마는 음식 솜씨가 뛰어났고 어른들이 날 보며 복스럽게 잘 먹어서 예쁘다 하니 더욱더 잘 먹었다. 그 시절의 난 놀랍게도, 날씬했다. 그땐 뱃살이 아닌, 다른 것으로 빛나고 있었기에.
학창시절, 내겐 존경하는 선생님과 선배들, 후배들, 그리고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신문을 만들고 때론 소설을 썼다. 고전문학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만화를 보며 설렘을 채우고, 편지를 쓰며 감수성을 피우던 그때의 난, 내가 봐도 참 반짝거린다.
먹을 복보다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부하던 시절이었다.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 입선 내지는 장려상을 받았는데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성적 이상으로 인정해주었다.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글로 먹고 살 순 없다는 걸 알았지만, 나보다 나를 더 기대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내 작은 재능이 얼마나 뿌듯했던지. 마음에 품은 시선이 햇빛이고 달빛이었다.
살다보니, 빛은 사라지거나 때론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학창시절과 사회생활의 대비란 마치 여름의 아침 바다와 겨울의 저녁 바다처럼, 온기와 색감 차이가 컸다. 더 이상 존경스럽지 않은 선배와 후배, 좋아할 수만은 없는 동료들 사이에서 먹고 살기 위해 해야했던 일과, 일과, 일들. 내 작은 재능은 꿈을 이루기에 부족했고 삶을 이어가기에는 생명력이 있었다. 다만 사회생활이라 일컫는 조직생활이라는 틀, 그 안의 정치에 서투른 내 영혼이 죽어갈 뿐이었다. 살기 위해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긍정적인 감정을 음식에서 찾아냈다.
‘그래, 맛있잖아.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거잖아.’
사라져가던 빛이 음식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춰 나를 생존으로, 행복으로 이끌었다. 마치 바다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을 파도가 어찌어찌 힘을 다해 해변으로 인도해준 것처럼, 사라져 가던 빛이 언덕처럼 솟아오른 내 뱃살에 양지를 만들었다.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모습이지만, 한편으론 웃기기도 하고 자조섞인 농담을 하며 내려놓음의 후련함을 즐길 때도 있다. 건강해보인다, 얼굴 좋아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그래, 기왕 곰돌이 푸의 뱃살을 닮은 김에 내면의 햇살도 닮아보리라 생각하다가 이 문장을 발견했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용감하고, 더 강하고, 더 똑똑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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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her Robin to Pooh
갑자기 학창시절에 나를 응원해줬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내 가능성을 나보다도 더 믿어주었던 사람들. 그들이 좋아했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특별히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었던, 너무도 평범했던 내가 글을 쓰길 바라는 마음에는 어떤 바람이 담겨 있었을까.
자신감이 없어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라도 그들의 반짝이는 마음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글을 써보겠다는 용기를 냈다. 그들이 어느날 우연히 마주한 글에서 위안을 얻게 된다면, 한때 당신이 응원했던 누군가가 그대를 그리워하며 쓴 마음이었다고, 타인을 향한 순수한 마음은 꼭 다시 나를 향해 더 애틋한 마음으로 다가온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출근길에 만나는 한강의 윤슬처럼, 살구빛 노을처럼, 가을 하늘처럼 반갑게, 겨울 호수에 비친 내 마음처럼 투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