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어떻게 놀아~?” 그는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나긋하게 말했다. 젠틀한 그에게서 5년 만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실 나는 놀았다. 하지만 영재인 그가 중학생 때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포기하고 치열하게 공부했을 지가 눈에 선해서 말을 삼켰다. 괜히 뻘쭘해서 맥주를 한 모금 삼키는 순간, 중2병이 전염병처럼 번지던 기억들이 스르륵 떠올랐다.
중2. 우리반 담임은 미술선생님이었는데, 양 날개처럼 솟아오른 펌을 한 숏컷에 작고 귀엽고 표정엔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선생님은 첫인사를 마친 후 “1년 동안 미술실 청소할 사람 손들어봐!”라고 말했다. 방과 후 미술실이라~ 어쩐지 낭만이 느껴져서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때 내 주변에 앉았던 친구들 4명이 나란히 손을 들어 우리 다섯명은 수업이 끝나면 매일 함께 미술실로 향했다.
미술실은 별관 4층에 있어서 다른 건물로 이동해야 했는데 마치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한 층을 다 쓸 정도로 큰 공간이었는데 한 60평 정도 되는 것 같다. 입구에 들어서면 중앙의 절반은 칠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좌우는 창가였다. 학창시절을 다룬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햇살과 바람이 일랑일랑이는 분위기다. 남향쪽 창가에는 서양화를 전공한 담임쌤의 그림이 줄지어 있었고 그 바로 앞 책상 위에는 오디오가 있었다.
우리 다섯명은 만화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청소하는 내내 각자 좋아하는 만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는지 수다를 떨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얘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만화를 써보자 라고 제안했다. 그림은 못 그리니까 소설로 써보자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취향껏! 친구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음날, 미정이는 CD를 가져와 담임쌤의 오디오에 다가가더니, 우리가 글을 쓸 때 몰입을 도와줄 것이라며 싱긋 웃었다. 우린 각자 좋아하는 스토리로 1시간 씩 소설을 쓰고 매일 서로에게 읽어줬는데, 5명이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매일매일 글을 쓰니 점점 더 매력적인 문장을 구사하게 되었고 스토리를 전개하는 힘이 붙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끼리만 보기 아깝다! 이걸 매주 한 권으로 엮어서 우리반 친구들이랑 같이 보자!’ 이번에도 친구들은 나의 제안에 찬성했다. 신이 났다. 내가 하고 싶은 걸 친구들이 다 같이 해주니까!
우리들은 소설잡지를 만들기로 했고 이름은 ‘COLOR’로 정했다. 글의 스타일이 다 다르고 작가명도 왠지 필명으로 하면 신비롭고 재밌을 것 같아서. 그렇게 우린 화이트, 블루, 그린, 그레이, 핑크가 되었다.
화이트는 CD를 가져온 미정이다. 그녀의 스토리는 미남미녀가 설레는 연애를 하는 순정소설이었다. 외모도 순정만화에 등장할 것 같이 예쁜 친구라 실제 연애담을 써서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린은 내 초등학교 동창 현주였다. 주제는 우정을 다뤘는데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했지만 6학년 때 좋은 친구들을 만나 회복한 경험을 토대로 친구의 소중함을 다룬 이야기였다.
그레이는 미연이었는데, 그녀가 택한 주제는 판타지. 당시엔 그 세계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우리 중 가장 성공한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유니크한 세계관이 킥이다!
핑크는 선미. 그녀의 글래머러스한 몸매와 깜찍한 얼굴은 마치 걸그룹 멤버 같다. 소설 속 주제는 15금, 아니 19금이라 해야 할까. 파격의 길을 걸었다.
나는 블루였다. 소설 제목은 ‘기다림’이었는데 서혜빈이라는 청순가련한 여인이 한 남자를 향한 그리움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글이었다. 실제 나는 예능 캐릭터이자 웃음 담당이어서 아무도 내가 쓴 글인 줄 몰랐을 것이다.
우린 매일 방과 후 미술실에서 소설을 쓰고 매주 토요일엔 표지를 만든 후 각자의 글을 5부씩 출력해서 오타 검수도 했다. 대망의 월요일 아침 8시. 교탁에 올려둔 우리의 COLOR. 두둥! 누가 보러 올까?
보러 왔다. 한 명, 두 명, 그리고 대기줄까지 이어졌다. 맙소사! 눈높이가 맞았기 때문일까? 같은 중2병이라 공감대가 컸는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인기를 더해갔고 언제 볼 수 있냐는 독촉이 빗발쳤다. 나는 또 한번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그래, 돈을 받고 대여를 해주자. 대여일은 2일. 그리고 1주일이 지나면 5배를 받고 팔자. 소장 가치가 있잖아!” 이 아이디어도 통했다! 우리는 용돈을 버는 것도 모자라 후원금까지 받았다. 너희가 이걸 계속해줬으면 좋겠다고, 응원하는 마음이라고 하며 수줍게 돈을 건네는 친구가 있었다. 떡볶이와 튀김을 몇 그릇이나 사먹을 수 있는 소중한 용돈을 우리에게 기부한 천사였다.
같이 합류하고 싶다며 다가온 친구도 있었는데 그림을 잘 그려서 만화 코너도 추가했다. 우리들의 소설은 소문이 퍼져서 다른 반 아이들까지 빌리러 오다가 급기야 어떤 반에서는 우리 같은 소설잡지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중2병은 전염병이 확실하다.
사실 우리들이 제일 재밌어 했던 건, 친구들이 소설을 읽고 얘기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멤버별로 인기도 가늠할 수 있었는데, 어차피 필명이라 누가 어떤 글을 썼다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들으니까 더 솔직하게 느껴졌다. 그때 제일 반응이 좋았던 건 역시 화이트! 여중생들에게 순정소설은 백발백중이다.
내 소설은 냉정히 말하면 또래들이 좋아할 만한 글감은 아니었다. 운명 같은 사랑이라 여긴 달콤한 순간은 잠깐이고, 내내 그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딱 만나며 끝났는데, 끝까지 읽어준 친구들이 용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향해 한 친구가 조용히 다가와 편지를 건네주었다. 음? 뭐지? 난 동그란 눈으로 그 편지를 바라보았다. 펜레터였다. 내가 블루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아이보리톤의 나무 질감이 느껴지는, 정성스레 고른 편지지와 정갈한 글씨, 내 글을 아껴주는 마음을 읽으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앞으로도 내 글을 응원하겠다던 마지막 한 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친구는 참하고 단아한 외모를 가진 모범생이었다. 마치 내 소설의 주인공 같은 분위기여서 이렇게 임자를 만나는구나 싶었다. 사실 난 그 친구가 우리 소설을 읽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이렇게 편지까지 쓴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친구의 수줍은 용기를 담은 펜레터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 뽀송한 봄이불처럼 남아있다. 난 가장 인기있는 글을 쓰는 멤버는 아니었지만, 한명이라도 이렇게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지금도 뿌듯하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서혜빈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우리들의 COLOR를 지금 와서 다시 본다면 손발이 사라지거나 그 글을 사라지게 하거나, 아마 둘 다 이겠지만 추억이라는 필터를 입힌 기억엔 낭만이 있다. COLOR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매일 소설을 쓰다 보니 글짓기 실력도 좋아져서 여러 대회에서 상을 탔고, 누적된 상장 점수 덕분에 원하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무슨 생각해~?” 중2병 시절의 추억에 잠겨 있던 나를 조심스레 깨우듯, 그가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생각해보니 내 중2병은 유치하기도 했지만 사랑과 우정, 글쓰기에 대한 기쁨까지 가득 차 있는 그리운 시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내 중2병 이야기를 들려줄까? 아니면 봉투에 편지지 넣듯이 마음속에 넣어둘까? 난 싱긋 미소지으며 그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