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잘 살 수 있을까?
변화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 시작될 때가 많지만, 그곳에서 새로운 문이 열린다.
단순하게 산다_사라 반 브래스낙
아무리 인생은 알 수 없다지만 내 평생 태백이라는 곳에 와서 살게 될 줄은 몰랐다. 남편이 먼저 와서 1년을 살아보고, 나와 아이들도 내려와 현재 3년 차 태백주민으로 살고 있다.
먼저 와서 지내본 남편은 태백이 무척 마음에 든다 하였지만 나는 여러 가지 고민과 걱정들이 많았다. 고민 끝에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이 시기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주말부부로 살기보다 함께하기를 택했다. 한편으로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해볼까?”라는 나답지 않은 마음도 조금 있었다. (주변 지인들은 아이들 교육, 먼 거리, 의료 등의 이유로 모두 뜯어말렸다.)
꿈꾸던 일 년 살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생각하지 뭐.
처음 태백에 내려왔던 날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차를 타고 오며 고한이라는 곳을 지나 두문동재 터널로 향하니 평균해발 900M란다. 해발고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귀가 불규칙적으로 먹먹해졌다. 마치 나의 마음처럼.
주변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하얀 눈이 가득했던 2월의 태백. 추워도 어찌 그리 추울 수 있었을까. 속눈썹마저 추웠던 날씨. 전에 살던 곳과는 확연히 다른 기온과 바람세기. 캐나다의 겨울이 이 정도일까? 아이들은 하얀 눈이 좋아 볼과 코가 빨개지도록 나가서 뛰놀며 마냥 즐거워했지만, 추위에 약한 나는 태백의 첫인상이 꽤 쌀쌀맞게 느껴졌다.
‘나 여기서 잘 살 수 있을까?’
이맘때 나의 오랜 친구 지안이 경주는 날씨가 조금 풀린 것 같다고 했다. 태백은 여전히 낮은 영하의 기온에 하얀 눈이 오락가락하는 겨울이 현재 진행형인데. 같은 대한민국 땅이 맞느냐고, 여기는 태백시 캐나다동이라는 다른 나라가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때부터였나.
“어디 사세요?”
- 태백시 캐나다 동이요.
계절의 반 이상이 하얀 겨울인 이곳을 <태백시 캐나다동>이라 부르기 시작 것이.
아이들이 다니게 될 학교와 동네 주변을 차로 탐색했다. 큰길들은 제설이 퍽 매끄럽게 잘 되어있다.
‘오호라,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의 도시답게 제설능력이 뛰어나네!’
내겐 신기한 일이기에 몇 번의 감탄사를 뱉어내며 동네를 누볐다. 작은 도로와 골목길에 접어들자 여기저기 쌓인 눈과 빙판길이 눈에 띈다. 운전이라면 어디 내놔도 서운치 않게 한 사람이지만 이런 식의 눈과 빙판 앞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에 자꾸 힘이 들어간다. 게다가 차가 살짝씩 밀릴 때마다 운전이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오, 뭐지? 저건 현지인의 연륜에서 나오는 능숙함인가?”
긴장이 역력한 채 다니고 있는 내 옆으로 무심한 듯 능숙하게 지나가는 차들.
부러움 반, 호기심 반으로 짝꿍에게 물어보니 여기는 11월에서 4월까지 스노우 타이어를 하고 다닌단다. 이름만 들어 보았지, 내가 그것을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네.
타이어를 보관하고 스노우 타이어로 바꾸는 일상이 자연스러워지면, 나도 이곳에 익숙해져 있겠지.
무엇이든 익숙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해.
긴긴밤_루리
낯선 장소, 낯선 사람, 그리고 낯선 생활의 지혜들. 낯설어서 불편하지만 그래서 새로운 두 감정이 교차한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주택살이.
아파트 단지에서 바로 걸어가던 초등학교가 아닌 매일 차로 가야 하는 새 학교.
그리고 내향형인 내가 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 가야 하는 새 동네.
‘과연 잘한 선택일까?’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애들은 잘 적응하려나?’
‘이 곳에서 나는, 우리 가족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하지만 이내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한 막연한 걱정은 그만두자고 고개를 내저어 본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거 아닌가. 그냥 나로 살면 되지. 뭘 거창하게 생각해.'
'새롭게 배우는 거 재미있어하잖아.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배운다는 생각으로 살지 뭐.’
‘두 아이가 사교육에 집중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다면 최고지.'
'우리 가족이 함께할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감사한 날들이 되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온갖 긍정회로를 돌려본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 의외의 지점들에서 여기서의 삶도 꽤 괜찮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공기 청정기를 끄고 활짝 문을 열고 상쾌한 공기를 흠뻑 마실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곳이라는 점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봐도 하얀 눈꽃이 가득한 풍경화 같은 곳들이 인심 좋게 펼쳐져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아무리 뛰어도 상관없는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곳이라는 점에서.
살아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들을 하나씩 탐험해가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심한 사람도 계절의 변화를 모를 수가 없을 만큼 자연이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낯선 곳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씩 써 내려가보는 삶도 꽤 괜찮지 않을까.
모든 순간은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다.
모모_미하엘 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