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루이즈더우먼’에 들어오던 당시 나는 ‘작가 멤버’였다. 작가로서 창작을 하던 당시의 기분을 설명하자면, 어딘가에 내 이야기를 꺼내놓고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질문은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하고, 한 곳에서 드문드문 들리다가 공기 중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작가가 던지는 질문과 회신 되지 못하는 대답 사이에 만들어진 틈을 꽤 중독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둘 사이의 틈을 보고 있으면,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하는 현실에서 나의 창작이 지속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었다. 창작을 지속하고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질문과 대답 사이의 틈을 연결하는 것, 그래서 그 둘이 서로 오갈 수 있는 순환의 과정이 간절히 필요했다.
아트페어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기획전 《pieces ofus》의 기획 의도를 처음 듣고, 창작에 몰두하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던 건, 아트페어와 같은 미술 시장이 작가의 지속가능성에 필요한 순환의 구조를 만드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작가로서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민할 때, 흔히 작품 창작에 드는 비용과 그에 따른 경제적 보상으로서 순환을 떠올린다. 특히 아트페어에 참여하게 된 작가라면, 작품의 판매 수익이나 판매량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창작을 지속하기 위해 금전적 차원의 순환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창작을 지속하는 데에 있어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작품을 의미 있는 것으로 감상해 주는 사람의 존재다. 즉 작가는 창작을 지속하기 위해서 누군가 자신의 작품이 가치가 있음을 알아봐 주고, 그 가치에 대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소통으로서의 순환을 필요로 한다.
특히 《pieces of us》는 여러 작품에서 크기와 금액, 정보에 대한 조건을 두어서 작품에서 감상자가 느낄 수 있는 감각적 가치에 집중하게 한다. 경력이 많은 작가든 경력이 적은 작가든 모두가 동등하게 감각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순환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그동안의 미술시장에서 작품이 작가의 경력이나 작품의 시세에 따라 소비되었던 반면, 여기서 관람자는 다른 외부적인 정보를 뒤로하고 “작품이 나에게 어떻게 느껴지고, 지금 그것이 나에게 어떤 가치인지”를 보게 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작가 멤버’에서 ‘큐레이토리얼 멤버’로 포지션을 바꾸던 것은, 나에게 “작가가 던지는 질문과 회신 되지 못한 대답 사이의 틈”을 채우기 위한 나름대로 시도였다. 작가와 감상자 사이의 틈을 막연하게 바라보기보다는, 글쓰기 혹은 기획으로 그 틈에 건널목을 만들어보려 했던 것 같다. 또 사적인 컬랙션 아트페어가 그렇듯 “작품이 나에게 어떻게 느껴지고, 지금 그것이 나에게 어떤 가치인지”에 집중한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장을 보면서 때로는 이질감을 느끼기도,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 소외감은 어쩌면 바쁘게 교환되는 것들 사이에서, 혼자 순환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롯된 고통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주하고 싶었던 미술시장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쾌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우리가 꿈꾼 미술 시장은 단순히 작품을 금전적으로 환원하는 장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질감 속에서 막연히 한걸음 뒤로 빠져있기보다는, 시장을 보다 넓은 광장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미술 시장’을 작품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반응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꿈꿔볼 수도 있지 않을까. 질문과 대답 사이의 틈을 채우는 또 하나의 시도로서 그 시작점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