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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전시 리뷰

견고하지 않은 땅에서 관계를 만드는 시도

이경민 개인전: 공기로 지은 땅(새공간)

by 정윤선


땅이란 언제나 흔들림 없이 항상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 같았다. 세월이 흐르고 몇백 년이 지나면 비와 바람, 온갖 것들의 작용으로 땅의 모습도 변화하겠지만, 그에 비해 인간은 짧은 시간을 머물다 간다. 인간의 입장에서 땅은 인간적인 것들에 비교할 수 없이 견고한 것이다. 그래서 땅은 불안하고 불완전한 나에게 순간이나마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 땅이 공기로 지어졌다면 어떨까. 이경민의 이번 개인전 제목은 《공기로 지은 땅(land formed by air)》이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기에 ‘땅’과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다. 그의 전시 제목은 가장 유연하고 투명한 ‘공기’로, 가장 견고하고 불투명한 ‘땅’을 짓는다는 발상을 전제한다. 이 글에서는 ‘공기로 땅을 짓는다’는 모순이 가진 의미를 나름대로 찾아가 보려 한다. 특히 작가 노트에 묘사된 기차 안에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작가의 시점으로 가서 작가가 외부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을, ‘기차’, ‘땅’, ‘층’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짚어보려 한다.



기차 밖 바라봄의 대상과 ‘나’ 사이의 층


어느 날 그는 우연히 기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보다가 그 풍경에 마음을 뺏겼다. 사람과 집, 나무와 구름, 그것들의 맨 뒤에서 가장 느리게 흐르는 하늘까지. 그는 자신으로부터 각자 일정한 거리를 가진 대상들을 인지하고 그들이 속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차 안에 앉은 작가와 풍경 사이에는 창문이 있었다. 여기서 ‘창문’은 외부의 대상 혹은 풍경을 인지하게 해주는 하나의 층이 된다. 기차 안에 있는 그는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기차에 실려 자신의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정지된 듯 정적인 기차 내부 공간과 창문 밖 흐르는 공간의 대비는 선명해진다. 창문은 작가와 응시의 대상 사이에 층을 만들고, 이 층은 ‘흘러가는 것 - 멈춰있는 것’처럼 둘 사이의 관계를 만든다. 작가가 무언가를 바라볼 때 언제나 그 사이에 창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에는 마치 창문처럼 그것과 ‘나’ 사이에 여러 층이 있었다. 그 층은 희미한 구름의 경계처럼 대상을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것이기도 했고, 그 대상에 개입되는 작가의 여러 감정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창문이 있던 기차 안에서도 창문이 없는 기차 밖에서도, 작가는 외부 존재들을 바라보면서 ‘나’라는 기준점으로부터 ‘나’를 둘러싼 외부와의 관계를 탐색해 왔다.

ㅤㅤ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바쁘게 탐색하는 와중에 ‘나’와 ‘타인’, 그 밖의 사물들이 지지하는 기반인 땅에 대해 생각해 보자. 땅은 흔히 나의 몸을 지지해 주는 것, 흔들리지 않는 기반, 영원불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세상에 영원불변하거나 미세한 흔들림도 없는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인간으로서 땅을 바라볼 때 땅이 주는 인상이란 이처럼 완전성에 가깝다. 땅은 불변하고 견고한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세계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지구(地球)가 ‘공으로 된 땅’을 의미하듯이 말이다.


공기로지은땅-전경_12.jpg 《공기로 지은 땅》 전시전경, 사진 하다원


ㅤㅤ그렇다면 작가에게 땅이란 무엇일까. 작가에게도 땅은 흔들림과 변화 없는 기반이자 세계 그 자체일 테지만, 여기서 땅은 ‘공기로 지은 것’이었다. 모순된 두 대상이 하나의 언어로 묶일 때, 그 언어는 이질적인 무언가를 상상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공기로 지은 땅’이라는 말은 작가에게 ‘나를 지지하는 기반’ 혹은 ‘세계 그 자체’가 견고하거나 흔들림 없는 것이 아닌, 희미하고 투명한, 엉성한 어떤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땅이라는 것이 안정감을 주는 만큼 ‘공기로 지은 땅’은 불안정한 기반과 세계에 대한 불안을 뜻할 수도 있다. 비유를 좀 더 확장해 볼까. ‘공으로 된 땅’, 즉 지구처럼 땅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 전체를 의미한다고 할 때, ‘공기로 지은 땅’은 작가가 바라보고 인지하는 세계가 단숨에 알 수 없고 한 줌에 붙잡을 수 없는 ‘부분’에 불과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추상화’하고 ‘압축’하기


기차 안에서 창문을 통해 마주한 풍경에는 나무와 풀, 길을 지나는 사람과 주택, 하늘과 구름 등이 있었다. 그가 본 풍경의 옆면을 상상해 보면, 거기에는 창문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대상이 위치하는 좌표와 층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그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무수히 많은 존재도 각각의 층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존재들은 겹겹으로 쌓인 어떤 풍경의 두께 안에 있다. 이경민은 나무와 풀, 하늘과 구름 같이 바라봄의 대상이 되는 것과 ‘나’ 사이의 거리, 그 사이의 층을 살핀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은 작품의 형식과 과정에도 드러난다.

ㅤㅤ작품에는 여러 종류의 층이 있다. 먼저 캔버스라는 평면에 내재된 층이 있다. 그림을 구성하는 각각의 선의 두께, 투명도, 선명함의 정도 그리고 선이 이어져 만들어진 면과 반투명한 선들의 중첩을 통해 구성 요소들이 각자 발생한 시간차와 위치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마치 원근법처럼 평면임에도 그 안에서 깊이와 층이 있는 것처럼 인지된다.

ㅤㅤ작품에서 층을 인지하게 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수많은 층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업에서 사용되는 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자. 전시장에 놓인 파일로 된 드로잉 북에는 2~4장 정도의 반투명한 트레싱지가 겹쳐서 칸마다 들어가 있다. 작가는 음악을 들으며 혹은 풍경을 바라보며 거기서 느껴지는 요소들을 선 드로잉으로 남겼는데, 이때 드로잉을 하면서 건식재료가 종이를 스치는 소리를 녹음했다. 이후 작가는 그 소리를 소재 삼아 들으며 다시 드로잉을 했다. 드로잉의 과정에서 난 소리를 다시 녹음하고, 이를 드로잉으로 옮기기를 두세 번 정도 반복해서 나온 몇 장의 종이가 겹쳐지면 한 시리즈의 드로잉이 나오게 된다. 그는 이러한 드로잉에서 때에 따라 선을 선별하여 캔버스 작업을 구성했다.


공기로지은땅-전경_14.jpg 《공기로 지은 땅》 전시전경(드로잉 북), 사진 하다원


ㅤㅤ작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작업을 완성하기까지 층을 만드는 과정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의 작업이 공유하는 특징이다. 종이를 맞붙여 복사하듯 찍어내는 모노타이프 기법이나, 한지 캔버스 위에 선 드로잉을 덧붙이는 등의 방식 역시 그의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층을 만드는 특별한 과정이다. 이러한 층 만들기는 풍경이나 음악에서 감각을 선으로 추상화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들은 여러 겹을 가졌지만 하나로 구분되는 페이스트리 빵처럼 하나의 화면에 담긴다. 하나의 면에 요소들이 담기면서 층이 압축된다.

ㅤㅤ이렇게 ‘층’은 대상을 인지하는 과정과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작품의 결과물 모두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작가는 대상을 응시할 때 대상을 완전하게 인지할 수 없고, 감정과 분리해서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없는 한계와 오류를 마주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한계와 오류는 다른 말로, 새로움과 놀라움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예술’이 그렇듯 말이다. 그는 한계와 오류를 새로움과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과정에서, 추상화와 압축이라는 층 만들기의 방식을 시도해 왔다. 그에게 ‘층’은 인지의 과정으로서 외부의 대상과 관계를 탐색하기 위한 기준일뿐만 아니라, 완전하게 인식하거나 기록할 수 없는 대상을 추상화하고 압축하여 작업에 담아봄으로써 대상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정확한 포착과 기록이 아닌, 관계를 만드는 시도


이경민의 작업은 더 이상 견고하지 않은 ‘공기로 지은 땅’ 위에 선 나로부터, 겹쳐진 수많은 층을 가지는 ‘너’와의 관계를 실험한 결과물의 한 단면이다. 〈Stroke the edge of the cloud〉라는 작품의 제목이 말해주듯, 흐릿하고 경계가 불분명한 구름을 따라가는 작가의 시도는 세상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 사실은 어떤 것도 선명하게 붙잡히지 않는다는 진실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진실이 절망이 아닌 즐거움이 되는 순간들을 찾기 위해 기꺼이 추상화와 압축이라는 놀이를 하는 중인 것 같다. 작가는 땅에 두 발을 디디는 감각에 대한 갈망을 종종 이야기했다. 하지만 사실 작가는 더 이상 견고한 땅은 없음을 알고 있다. 한 줌에 잡히지 않는 부스러지는 땅 위에서 무엇을 본다 한들, 그것 역시 엉성하게도 전체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견고하지 않은 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언가를 정확히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인지하고 기록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관계를 맺는 것’ 아닐까. 작가가 작업을 통해 그래왔듯이 말이다. 그러니 이제 작가에게 두 발을 디딘다는 것은 기차에서 내려서 단단한 땅에 발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바닥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 알 수 없는 구름 위에서 허우적거리며 발을 빠뜨리는 것이 아닐까. 한지 위에서 선들이 겹쳐지고 번지듯이, 두 발은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어떤 곳으로 스며들 것이다.


공기로지은땅-전경_5.jpg 《공기로 지은 땅》 전시전경, 사진 하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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