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타 Feb 13. 2024

'섬뜩한' 흰색

허먼 멜빌은 <모비 딕>에서 흰색에 관한 이야기에 한 장 전체를 할애한다. 


<42. 고래의 흰색> 중


은하수의 하얀 심연을 볼 때 우주의 무심한 공허와 광막함을 어렴풋이 보여 주면서 절멸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등을 찌르는 건 그 색의 무한함일까? 아니면,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이라기보다 가시적인 색의 부재인 동시에 모든 색이 응집된 상태는 아닐까? 광활한 설경이 무심하게 텅 비었으면서도 의미로 가득 찬 건 이런 이유 때문일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몸이 마비된 우주는 나병 환자처럼 우리 앞에 누워 있고, 유럽 북단의 라플란드를 지나면서도 색안경을 쓰지 않으려는 고집불통의 여행자처럼 저주받은 이단아는 주변의 모든 풍경을 감싼 광대한 흰색 수의를 보다가 눈이 멀어 버린다. 그리고 백색증 고래는 이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_

챕터의 반 정도를 여러 시대와 문화권에 나타나는 다양한 흰색의 이미지를 설명한 다음, ‘흰색의 섬뜩함’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왜 이 긴 소설이 ‘고전’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 중 하나다. 


섬세한 문학적 문장뿐만 아니라 곳곳에 숨겨진 미스터리한 장치(반드시 뒤와 연결된다), 연극 대본 같은 챕터, 뮤지컬 같은 장면 등 소설이 아니라 마치 실험적인 현대 영화를 보는 것 같다.


_

<42. 고래의 흰색>을 읽다가 문득 요즘 시대의 ‘섬뜩한 흰색’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음. 역시. 바로 ‘흰색 자동차’가 떠오른다. 운전을 하다가 눈앞에, 혹은 백미러나 사이드미러를 통해서 언뜻 흰색이 보이면 긴장하고 조심한다. 출시된 지 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흰색 세단 OO가 가장 위험하다. 


어두운 회색 아스팔트 바다 위에 출현한 음습하고 섬뜩한 흰색. 에이해브 선장처럼 그 도로의 모리배들에게 거대한 작살을 힘껏 집어던졌으면 좋으련만. 

작가의 이전글 단편. 건조한 방백傍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