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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타 Feb 10. 2024

단편. 건조한 방백傍白.

“물리학자들이 ‘계산’한 ‘개념적’ 최소 길이 단위는 ‘플랑크 길이’이며, 1.6x10의 -35승m이다. 관측된 최소입자 ‘쿼크’의 반지름 측정 결과는 R < 4.3×10의 -19승m이며, 중성미자(뉴트리노)는 10의 -24승m이다.”


이 정보를 옮겨 적다가 중성미자 앞의 숫자가 빠진 것을 눈치챘다. 다시 검색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어차피 모른다. 그저 제일 ‘작은’ 것이 플랑크 길이인 모양이다. 최소 길이(플랑크 길이)가 최소 입자보다 작다는 개념이 의외로 상식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그동안 읽었던 교양 물리학 책들 속에는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이야기’들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쿼크니 중성미자니 하는 것들은 천일야화보다 기이하고 때로는 재미있는 ‘이야기’ 일뿐이다.


우리는 오랜만에 (거의 10년 만에) 만나서 안부를 묻고 여러 가지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좀 난데없이 ‘플랑크 길이’라는 용어가 툭 튀어나왔는데, 다른 주제를 얘기할 때보다 말소리가 살짝 커졌다. 다들 과학과는 거리가 한참 먼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도 평소에 양자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한 명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플랑크 길이? 무슨 말이야. 처음 들어 보는데? 이 우주에서 가장 작은 입자는 ‘쿼크’지. 쿼크보다 작은 건 없어.” 


다른 한 명이 그에게 ‘플랑크 길이’를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그는 그 정보를 쓱 훑어보더니 ‘개념적’이라는 단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그냥 ‘개념적’인 이론이네. 실제로 관측한 건 아니잖아.”


‘플랑크 길이’에 관한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지금껏 우리가 나눈 대화는, 그리고 계속 이어진 대화는, 서로를 향한 혼잣말이었다. 우리는 연극 무대에 선 연기자인 동시에 관객이었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얼마나 재치 있는지, 얼마나 똑똑한지 스스로 확인하는, 플랑크 길이처럼 작은 (하지만 플랑크 길이보다는 의미 없는) 건조한 방백傍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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