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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타 Jun 25. 2024

길거리 이야기 22.

한 중년 여성이 교회 이름이 새겨진 휴대용 티슈를 나눠 주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덥석 받았겠지만 마침 가방 안에 휴대용 티슈가 몇 개 있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더 필요할 것 같아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물자가 풍부한 시대라 그런지 길거리에서 나눠 주는 물건을 이제는 잘 받지 않게 된다. 하지만, 만약 모나미 153 볼펜이라면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냉큼 받았을지도. (요즘 ‘그 모나미 볼펜’이 왜 그렇게 좋아 보이는지)


문득 옛날 옛적 일이 생각났다. 

Once Upon a Time... E여대에서 밴드 공연이 있었다. 스틱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요즘에는 아이돌 그룹 일색이지만 당시 대학 축제에는 인디 밴드 공연이 많았다. E여대는 오픈형 캠퍼스인 데다가 축제 기간이라 남자들도 꽤 있었다. 


누군가 사람들에게 휴대용 티슈를 나눠주고 있었다. 나한테도 티슈를 쑥 내밀길래 덥석 받았다. 마침 티슈가 필요하기도 했다. 걸어가면서 한 장 꺼내려고 보니 티슈가 아니라 생리대였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성들에게만 나눠주고 있었다. 그때 나는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기르고 다녔다. (나는 머리를 길게 기른 평범한 이성애자 남성 록커다) 생리대는 나중에 여자친구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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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여자친구(그 생리대를 줬던)가 다니던 D여대에 가끔 놀러 갔다. 그 학교는 E여대와 달리 캠퍼스에 남자가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어느 날 여자친구와 가볍게 얘기를 나누며 D여대에 들어갔다. 정문을 지나 10여 미터 정도 걸어갔을까. 뒤에서 실랑이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다. 한 젊은 남자가 수위 아저씨한테 가로막혀 못 들어오고 있었다.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자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참 편리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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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머리가 길어 ‘편리’한 점도 있었지만, 불편했던 (짜증 났던) 경험도 있었다. 성추행을 적어도 10번 이상은 당했던 것 같다. 똑같은 공간이지만, 여자가 걸어 다니는 바깥세상과 남자가 걸어 다니는 바깥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그때 조금 체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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