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미술과였었나. 회화과나 조소과 같은 파인 아트 계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너무 쉽게 변질되어 믿을 수 없긴 하지만 어쨌든 그 여학생이 미대생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미대 벤치에 앉아 있을 때 그 여학생이 지나가던 모습을 기억한다. 대체로 흐릿하지만 일부는 또렷하게. 팔다리가 가늘고 길었다. 주로 무늬가 없는 짧은 검은색 치마에 역시 무늬가 없는 검은색 하이힐을 신었다. 긴 생머리도 유달리 까매서 가뜩이나 흰 얼굴과 팔다리가 더욱 하얗게 도드라졌다. 무당거미. 새까맣고 길쭉하면서도 예쁜 무당거미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 같았다.
일주일에 세 번 미술학원 강사 알바를 뛰러 학교 앞과 A구 방면을 오가는 66번 좌석 버스를 자주 탔다. 그 시간대 버스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쾌적했다. 그날도 타자마자 빈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바로 다음 정류장에서 익숙한 하얀 얼굴이 버스에 올랐다. 그 여학생이다. 두 좌석이 모두 빈 곳은 없었다. 그녀는 특유의 거미 같은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버스 뒤편으로 들어와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향긋한 냄새가 내 코 속으로 쑥 들어왔다. 머스크 향인가. 뭔가 동물적인 향이다. 그녀는 꽤 피곤했는지 몇 분도 안 되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각도가 점점 커지면서 이내 내 왼쪽 어깨를 찧고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기를 반복했다.
일주일 후, 그녀가 또다시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날도 피곤했는지 바로 내 어깨에 고개를 찧기 시작했다.
며칠 후, 그녀가 이번에도 내 옆자리에 앉았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처음 몇 번은 여느 때처럼 내 어깨에 방아를 찧다가 그날은 아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왼쪽 어깨를 통해 기분 좋은 무게감과 작고 동글동글한 머리 형태가 느껴졌다. 여전히 검은 옷과 검은 구두를 신었고 내쉬는 숨결에서도 좋은 냄새가 났다. 9월 초라 여전히 날은 후덥지근했는데도 내게 전달되는 그녀의 체온은 시원했다.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다음 주, 그녀가 또 내 옆자리에 앉았다. 연속 네 번째다. 그날도 바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기 시작하다가 이내 내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저번보다도 빨랐다. 그녀의 차가운 체온과 기분 좋은 향기를 느끼며 한참을 그렇게 갔다. 검은색 옷차림도 여전했다. 그녀가 내릴 정류장에 가까워지자 알람이라도 켜진 듯 그녀는 눈을 떴고 고개를 똑바로 세워 바로 앉았다. 순간 그녀에게서 약하게 옻칠을 한 목가구 냄새와 향불 냄새가 났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고 말았다. “저기, 혹시...”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