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으로 잠 못 이루는 저녁
[아래 내용은 픽션입니다.]
오후 6시, 출발한 지 한 시간쯤 되어 노을이 완전히 지자 버스 안이 어두워졌다. 모두 잠들었고 간간이 알림을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 화면이 반짝였다 꺼졌다. 바깥에는 헤드라이트가 바쁘게 지나갔고, 저 멀리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은 그곳이 아무것도 없는 논밭임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A는 버스 맨 뒷줄 왼쪽 좌석에 앉아 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이렇게 덜컹거리는 공간은 불편해서 웬만해선 잠을 잘 수 없었다. 스마트폰을 계속 붙잡고 있기도 꺼려졌다. 보조 배터리를 들고 오지 않았거니와 머리만 아팠다. 다만 아무 일이 없는데도 괜스레 알림을 확인하는 습관은 어쩔 수 없었다. C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광주에서 뭐 했어?” 그걸 생각하면 또 잠을 잘 수 없었다.
A는 B를 만나러 갔다. 9개월 전, B는 고시 통과에 실패하고 고향 광주로 떠나버렸다. 둘이 3년 동안 같이 준비해왔던 시험이었다. A는 시험 직전에 외웠던 내용이 진짜 출제되는 운이 따르면서 시험을 통과했다. 합격권에서 불과 몇 점 떨어진 점수를 두 번 연속으로 받고 좌절했던 B는, 나름 차분히 시험을 준비했지만 지난 시험보다 한참 떨어지는 점수를 받았다. 시험 다음 날 만나 채점한 자리를 마지막으로 B는 떠났다. 메시지는 드문드문 읽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며 A는 B에게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됐다. 일도 바빴지만, 자신만 살아남아 미안했다. 지난주 눈 딱 감고 보낸 메시지에 B는 예상과 달리 살갑게 반응했다. 대화를 마치자마자 A는 광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A는 B가 그리웠다. “밥은 누가 샀어?” “친구가 와줬다고 고맙다며 샀어.” “좋은 사이다. 둘이 썸 타는 거야?” C의 질문에 A는 눈썹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C는 B와의 관계를 몰랐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어.” 문자여서 할 수 있는 거짓말이었다. 눈앞에서 그 질문을 받았다면 복잡한 마음이 드러날 것이었다. B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 당당했다. 한번 확신하면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으며, 보조개가 살짝 올라간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전화하면 바로 달려갔고, 몇 번의 부끄러운 순간을 거쳐 서로의 술버릇을 가볍게 받아넘길 수 있게 된 편안한 사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장난 섞어 불평할 때도, 무겁게 피로감을 호소할 때도 가만히 말을 들어줬다. A는 B에게 끝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B는 역까지 나와 A를 맞았다. A는 어떤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걱정했지만, 배고프다는 말로 간단하게 풀렸다. B는 아홉 달 동안 오히려 편하게 지냈다며,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다시 찾았다고 말했다. 전공과 영어 실력을 활용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기업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안 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A는 가만히 들었다. 연애 이야기는 B가 먼저 꺼냈다. 나 외롭다. 주변에 좋은 사람 없어? A는 웃으면서 주변엔 이상한 사람뿐이라고 둘러댔다. B는 A가 4년 사귄 애인과 고시 문제로 다투면서 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었다. A는 그 과거를 반복하는 게 두렵다고 두어 번 B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A는 아직도 두려웠다. 꾹 참고, 장난기를 한껏 끌어올려 말했다. “나는 어때?” B가 깔깔 웃었다. 마음이 쓰렸다.
A와 B는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주변을 걸었다. 공사하다 만,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보였다. 지난겨울 사람 여섯 명을 잡아먹은 건물은 철거한다는 약속과 달리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언제 철거한대? 나도 몰라. A는 저 건물이 마치 자기처럼 느껴져, 언제까지 저 건물이 저 자리에서 서 있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출발 시간을 5분 남기고 B는 말했다. 나 곧 서울로 올라가. 곧 봐. 연락할게. A도 화답했다. 연락할게. 즐거웠어. B는 버스에 탄 A를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A도 두 손을 흔들었다. A는 갑자기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담지 않고, 두 손을 흔들고 있는 B를 스마트폰 화면에 담았다. B는 또 깔깔 웃었다.
“친구에서 연인 되는 경우도 많잖아.” “지금은 없어.” “뻥치네, 관심도 없는데 어떻게 감정 없는 사람을 만나러 여섯 시간을 가?” A는 C가 한쪽으로 자신을 몰아가려고 하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면서도, 그 질문대로 인정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과거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욕구를 꾹 눌러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래. 넌 모르니까. A는 B에게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내려다, 진짜로 버스에서 내려서 보낼까 하고 메시지를 다시 지웠다. 터미널에서 찍었던 사진을 한 번 보고, 화면을 껐다. A는 억지로라도 잠들기 위해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쿵쿵대는 진동을 받아내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버스에서의 저녁은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