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우는 방법을 모르게 된 이유
[아래 내용은 픽션입니다.]
친구가 아파트 옥상에서 스스로 떨어져 죽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장례식장과 발인식에 모두 갔다. 관이 화로로 들어가기 직전 친구 어머니는 내 바로 옆에서 소리 내어 통곡했다. 나는 슬픔과 황망함의 포로가 되어 친구가 화장되는 걸 지켜봤다.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울면 안 돼”라는 말을 아주 바람직하게 여기기도 했고, 세상이 거대한 농담으로 느껴져 무슨 감정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거대한 농담이 나를 찾아온 건 두 번째로 첫 번째는 4년 전에 겪은 따돌림이었다. 죽음은 따돌림을 가볍게 압도하며 모든 기억을 씻겨냈다.
화장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뒤 비로소 속이 일그러졌다. 나는 혼란이 진정되자 ‘왜?’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돌림은 이유가 없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됐다. 이번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 나와 그는 세 번 만나 똑같은 문답을 세 번 반복했다. “별일 없지?” “별일 없지.” 나는 나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남은 시간을 썼고, 그의 삶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몇 마디를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도 발인식에서도, 그가 고등학교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과 무슨 일이 있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돌았다. 큰 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가 내게 아주 가까이 있지는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너무 멀리 있지도 않았다. 중학교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갔을 때, 찬조 연설을 해 달라고 끈질기게 부탁해서 다른 사람을 맡기로 했던 내 약속을 바꿨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한 달 간격으로 문자를 주고받았으니까. 거스른 시간에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게 되자, 친구는 빠르게 내 세계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나는 내게 거대한 농담을 막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치유와 애도를 하지 않았다. 십자가를 무겁게 여겼다. 생애 처음으로 경험한 책임이어서 더욱 무겁게 평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모든 걸 알 수 없었으니 잘못이 없다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또, 고등학교 2학년이란 지위는 감정을 분출하고 치유하기에 맡은 책임이 과중했다. 적어도 내가 있던 학교에서는 그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 기말고사와 모의고사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모순적으로 그 말은 잘 들었다. 그렇게 나는 십자가를 반쯤 발목에 묶고 질질 끌고 다니게 되었다. 애도를 생략하자 웬만한 슬픔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은 더욱 울지 않게 됐다.
한 번 습관을 들이니 오래 갔다. 십자가는 크기가 더 커졌다. 진도에서 여객선이 침몰했을 때 나는 똑같이 행동했다. 서로 위로할 틈도 없이 나는 치유를 접고 일상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이번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갈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앰뷸런스의 빨간 불빛이 이태원 거리를 가득 메웠을 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덧난 상처가 느껴져 의자 위에서 끅끅거리며 비틀거렸다. 거대한 농담 앞에서 다시 황망함의 포로가 된데다, 소리 내어 우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다시 내가 과거를 반복할까 봐,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반복할까 봐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