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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석 Nov 02. 2022

작문 연습: 이름

이름에만 초점을 맞추면 문제를 풀 수 없어

“그의 이름은 라면입니다.”

“아닙니다. 그의 이름은 아멘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들렸습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하몬이라 불러야 옳습니다. 전문가에게 소음 제거를 맡겼더니….”

  

여기서 문제. 내 이름은 뭘까?


안녕, 인간? 그러니까, 지구-1218의 인간? 나는 신이야. 지구-0922를 관장하는 절대자지. 아닌가? 옆 지구 사는 스탠 리라는 신에게 물어봤더니 맞다고 했는데. 얼마 전에 황당한 일을 겪어서 다른 지구에 하소연하고 있거든. 휴가를 다녀왔거든. 일이 워낙 바빠서 스트레스도 풀고 확실하게 쉬려고. 거기는 신이 나 하나뿐이야. 그렇다 보니 몸이 열 개, 아니 억 개라도 모자라서 고생이야. 지구-1218은 신이 아주 많다며? 업무 분담도 잘 돼서 일하기 좋은 곳이라던데. 하루에 처리하는 소원이 70억 개에 구원 심판 접수만 20만 건이야. 그것뿐이게? 사랑을 나눌 때도 비탄에 빠질 때도 나를 찾아. 혼자서 어떻게 처리하란 말이냐고. 참나. 오 마이 갓!


지금까지는 심심하면 태풍이나 지진을 일으켰는데, 이번엔 좀 대단한 장난을 쳐 보고 싶었어. 세계 평화… 한번 내가 만들어 봐? 어차피 내가 신인데! 인간의 몸을 하나 골라서 지구로 딱 내려온 다음, 지구의 모든 무기를 없애버렸어. 핵무기가 저절로 발사되더니 우주로 날아가서 폭발했지. 하늘이 아름답더라. 재밌는 구경 했어. 곧바로 거적때기 걸치고, 수염 그리고, 거리 돌아다니며 몇 마디 해 줬어. 불치병 고쳐주고, 강 좀 걷고, 미래 살짝 봐주고. 소소한 일들. 세상이 혼란해진 차에 내가 나타나니까 대단하게 보였겠지. 스마트폰 카메라와 플래시에 둘러싸였어. 메시아! 메시아! 그래, 인간들아, 실컷 즐겨 둬.


그런데 실수했어. 기분이 좋은 나머지, 무기도 내가 없앴다고 말해버렸지 뭐야. 그러자 이번엔 기자가 몰려와서 내 주변을 플래시 대신 마이크로 메웠어. 제일 귀찮았던 질문? “이름이 뭔가요?”. 궁금해할 만하지. 하지만 난 이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걸. 처음엔 그냥 둘러댔어. 뭐… 조 바이든? 그러자 다들 장난치는 걸로 생각하는 거야. 한번은 본심을 고백했다? 나 신이에요. 神. God. 안 믿어. 바이럴 마케팅이래. 그래서 확실히 매듭을 짓기로 했어. 처음부터 날 졸졸 따라다니던 방송국 PD가 있었어. 밤 10시 메인 토크쇼에 나가겠다고, 안 가리고 딱 말했다? PD가 헐레벌떡 전화를 걸더니, 엄지를 척 들어 올렸어.


“선생님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첫 질문이었어.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엄청나게 긴장했어. 내가 신인데! 지금까지 생각 안 해봤던 걸 생각하려니까 답답해 미치겠더라고. 그것도 남이 보는 앞에서 하려니. 난 오랫동안 방구석에서 혼자 일해왔다니까?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었어. 그때 라면이 멀리 보이는 거야. 촬영을 너무 오래 해서 배고팠나. 이름을 언급하면 광고라고 의심받을 것 같아서 얼버무렸어. 아…. 여…. “네?” “말했잖아요. 아…. 오….” 두세 번 그러니까 진행자도 머쓱했는지 넘어가더라고. 나도 부끄러워서, 다른 질문은 시원하게 지르고 나왔어. “다음엔 어떤 기적을 보여줄 계획입니까?” “식량을 늘려 굶주림을 없애겠습니다.”


촬영이 끝나고서 정부 요원이 날 체포했어.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해를 끼쳤대. 내가. 푸하하! 장단 맞춰 주려고 순순히 따라갔지. 날 저 멀리 절벽 근처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가뒀어. 뷰는 좋더라. 기왕에 끌려온 김에 잠 좀 잤어. 나도 쉬어야지. 시간 모르고 자다가, 느지막이 일어나서 짐 챙기고 감옥 바깥으로 나왔어. 난 신이라니까. 따뜻한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려고 근처 카페로 들어갔어. 그런데 주인이 날 보고 자지러지게 웃더니, “당신 그 인간하고 닮았네, 해봐요. 아…. 여…” 뭔 소린가 싶어서 일단 도망쳤어.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잠든 사이에 세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어. 텔레비전에서, 신문에서, 스마트폰에서 무기와 식량 이야기가 싹 사라졌어. 내 눈으로 똑똑히 읽었던 기사도 없었어. 삭제됐대.


내 얼굴은 평화의 상징 대신 어리숙한 인간을 조롱하는 상징이 됐어. 밈이 돼버린 거지. 한 코미디 쇼에는 이런 게 나오더라고. ‘백 분 토론: 저 사람의 이름은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가?’ 라면, 아멘, 하몬, 아몬드, 날리면…. 인간의 상상력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지면서도, 내가 한 일은 모두 잊히고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었어. 군수 산업은 오히려 활기를 찾았대. 원래도 충분하던 수요가, 내가 무기를 없애버리는 바람에 엄청나게 늘었대. 인간이 없어 주문을 못 받을 지경이래. 토크쇼 영상은 다시 볼 수 없었어. 정부에서 그렇게 막아 버렸을까? 커피 한 잔은 마시고 싶었으니까, 다시 들어가서 “아…. 여…”라고 말해 줬어. 다들 웃고 쓰러지더라.


에스프레소 두 잔째를 막 마시던 찰나, 사이렌이 들려오기 시작했어. 이크. 내가 나간 걸 이제야 알아챈 모양이구나. 잔을 내려놓고 언덕을 넘어 절벽 방향으로 뛰었어. 뒤에서는 검은 선글라스를 쓴 요원 여럿이 쫓아왔지. 뛰면서 생각하는데, 이럴 거면 내가 왜 무기를 없앴을까…. 정나미가 떨어져서, 휴가를 끝내기로 했어. 절벽에서 멋지게 몸을 날리고, 그 자리에서 복귀했어. 사무실로 돌아와서 운석 몇 개 궤도를 지구로 수정했지. 그거 수습하려고 인간은 고생 좀 할 거야. 난 신이라니까. 후후.


그래서, 내 이름은 뭘까? 한 번 더 말해 줄게. 아…. 여… 그렇게 들린다고? 아냐. 틀렸어. 정답이 뭐냐고? 내가 말했지, 난 이름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니까. 재밌는 거 알려줄까? 맞추려고 하면 지는 거야. 이름에만 초점을 맞추면 문제를 풀 수 없어. 핵심을 봐야지.


[해설: 마블 코믹스 유니버스에서 지구-1218은 슈퍼히어로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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