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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석 Oct 29. 2022

작문 연습: "자니?"

취향만 사랑하는 사람

"자니? 혹시 방에 체크카드 못 봤어? 지갑에 없어서."


새벽 두 시. 남자는 덜컹거리며 한남대교를 건너는 심야버스 좌석에 앉아 저 문자를 쓰고 있다. 이 버스에 타는 사람은 보통 두 부류로 나뉜다. 술에 취했는데 택시 탈 돈이 없는 사람과, 지하철이 끊긴 밤늦게까지 일한 사람. 남자는 전자다. 남자의 마스크는 빨갛게 달아오른 코와 뺨을 감추고 있다. 코가 내뿜는 공기는 다른 사람의 공기와 섞여 알코올 맛이 난다. ‘혹시’를 ‘호기시’로 쓰지 않기 위해, ‘못’을 ‘놋’으로 써서 보내지 않기 위해 남자가 부단하게 노력하는 게 보인다. 눈은 무섭게 깜빡이고, 엄지손가락은 참 바쁘게 움직인다.


남자는 여자와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한 달 전 종로 스터디룸에서 나눈 몇 마디에서, 남자는 여자가 장뤼크 고다르와 아스널 FC에 모두 반응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런 사람을 남자는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지금껏 그런 주제를 꺼내면 시큰둥한 반응을 보내기 일쑤인 애인만 만나 왔는데. 잠깐 격렬하게 대화를 나눈 뒤, 남자는 스터디원끼리 밥을 먹자는 말을 자꾸 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속내는 분명했다. 그게 이루어진 게 몇 시간 전이었다. 남자는 여자도 좋아한다고 한 하이볼 잔을 함께 부딪쳤다.


계획대로 흘러갔다. 다른 스터디원은 집으로 돌아갔다. 술집을 나오자 남자는 여자에게 생각해 두었던 핑계를 댔다. 이야기하느라 얼마 마시지도 못했는데, 솔직히 여기서 그만두긴 아쉽다. 핑계는 잘 먹혔다. 남자는 여자와 맥주 몇 캔을 사서 여자가 사는 곳으로 갔다. 책상 하나에 한두 명이 누울 만한 침대가 깔린 방이었다. 남자는 술집에서 하던 음악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여자는 액슬 로즈라는 이름에도 반응한 터였다. 한 곡을 같이 따라 부르다가 물었다.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밤 여기서 자도 되냐고.


여자는 방이 더럽고 베개도 없는데 잠이 잘 오겠느냐고 피식 웃었다. 남자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감을 감지했다. 자칫하다가는 다음 스터디에서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게 될지도 몰랐다. 남자는 어색하게 웃고, 소변을 본다며 화장실에 들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대화를 계속하지? 말이 점점 엇나가기 시작했는데도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갔다. 남자는 싱크대 위에 놔둔 지갑을 생각했다. 술집에서 직원에게 보여 준 운전면허증을 남자는 도로 집어넣지 않았었다. 남자는 손을 씻고, 가방을 챙기고, 웃으며 인사했다. 여자는 멀리 나가지 않았다.


버스는 신사역에 닿았고, 3분 동안 끙끙대던 남자는 마침내 오타 없이 문자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여자는 알림 센터에 뜬 메시지를 흘깃 보고, 보란 듯이 단정하게 놓여 있는 신분증을 발견하면 아마 지겹다는 듯 숨을 내쉴 것이다. 아주 꼴값을 떨어요. 내가 네 계획을 모르는 줄 알고? 여자는 취향만 사랑하는 사람을 4년 동안 수없이 보아 온 터였다. 착각을 홀로 견뎌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여자는 늘 그랬듯 점심쯤에 남자에게 무심하게 답장할 것이다. 그러고는 남자를 스터디에서 조용히 내보낼 방법이 없을지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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